네 번째 면접교섭
나와 아이가 코로나에 감염되면서 2주가량을 둘이서만 집에 있었다. 둘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벚나무의 분홍빛은 보지도 못했는데 초록색 잎들이 가득해져 버렸다. 외부의 시간과 단절된 채 아이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둘이서 만들기도 하고 책도 읽고 하는데 하루가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이 속도대로 두어도 되는지 걱정되었다. 격리기간이 끝나면 잡혀있는 면접교섭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하나의 몸처럼 붙어 2주를 보내고 나니 아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너무 많이 의지를 한 탓일까. 오히려 아이는 아빠를 만나러 갈 생각에 해맑게 웃고 있는데 나만 안절부절했다.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정작 아이는 저렇게나 씩씩하고 독립적인데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기대고 있다니.. 한편에서는 이게 옳지 않다는 생각도 같이 커졌다. 아이에게 의지하다 끝끝내 아이의 인생도 불행하게 만드는 숱한 경우를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육아의 목적은 아이의 독립이라고 한다. 아이가 개인으로, 사회 구성원으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심리적인 지원과 환경을 마련해주면 되는 것인데 이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아이는 점점 자기 혼자 할 수 있다고, 하고 싶다고 하는데 엄마인 나는 아직도 입에서 '우리 아가'라는 말이 나온다. 다른 사람이 아이의 가방을 둘러메고 가는 모습을 보면 혀를 차 놓고 정작 나는 아이가 무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가방을 뺏어 든다. 아이를 위한 길이 아님을 알지만 안쓰러움을 느끼는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결국 또 이런 행동을 한다. 아이의 불편함과 어려움보다는 그걸 지켜보며 참고 견뎌야 하는 게 내 상태가 싫어해줘버리고 만다.
아이가 아이 아빠에게 가있는 동안 밥을 먹다가, 이를 닦다가 문득문득 아이가 생각날 때면 육아의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아이가 커지는 만큼 내가 같이 크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게 망쳐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해주고, 도와주고, 나서는 것보다 기다리고 견뎌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더 많은 인내심을 요하지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가 사춘기가 오고, 성인이 되면 지금의 사랑을 추억 삼아 우뚝 설 수 있도록 지금 듬뿍 사랑을 주면서 조금씩 나와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존중해주는 연습을 해야겠다.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나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 아닌 바로 서있는 모습이기를 바란다. 각자 살다가 힘들때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 사회의 험난함을 잠시 피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식사자리에서 대화가 풍부했으면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키운다는 생각도 든다. 부족하지만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고 시도하고 조절해 나간다. 아이가 없었다면 내가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함께 크는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