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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시간 Sep 07. 2022

필사를 하는 이유

문장수집가

학창 시절 친구들이 포켓몬 스티커를 모을 때도, 아이돌의 사진을 모을 때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가 필요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필요 없는 것들은 얼른 처분하는 효율적인 삶의 방식을 동경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인덱스 없이는 책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담아두고 싶은 문장을 발견할 때 바로 표시해두지 않으면 그 문장이 그냥 흘러가버릴 것 같다. 그렇다고 매 장마다 책의 귀퉁이를 접을 수도 없었다. 다시 책을 펼었을때 한 귀퉁이에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선을 보는 것도 마뜩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붙잡고 싶은 문장이 있으면 그 줄 옆에 바로 표시를 해두고 읽는다. 책 속의 세상에 집중하다 중간에 흐름이 끊기면 생각의 흐름도 멈춰버리기에 내가 책을 자주 보는 침실, 책상 위에는 항상 인덱스가 있다.  이렇게 나는 문장을 수집하고 있다.




세상에 어떤 문장들은 그냥 나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평소에 내가 깊게 생각하고자 했던 부분이었는데 어휘력에 부족해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을 때가 있다. 헛바퀴 도는 나사처럼 뱅글뱅글 돌기만 하다가 풀려버린 적이 많았다. 그때 적절하고 절묘한 단어가 담긴 문장을 만나면 내 생각이 갑자기 명료해진다. 그런 문장은 나에게 와 오랜 시간 머물다 간다. 자기 전, 출근하기 전, 무언가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에 문득문득 생각나 그 문장을 발견했을 때의 쾌감이 계속 느껴진다. 세상에 또 어떤 문장은 내 마음에 일부러 아로새긴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내가 원하는 지향성을 가진 글을 보면 표시를 해두고 의식적으로 되뇐다. 그러면 어느샌가 내가 꼭 그런 사람이 되어있을 것 같다.


그리고 조용한 새벽시간 필사 노트를 꺼내 책을 다시 살피며 문장을 옮겨 적는다. 다시 책을 보며 처음 읽을 때는 분명 빛나는 문장이었는데 지금은 빛을 잃어버린 문장도 있고 붙여놓은 곳의 아래 문장이 더 눈에 보일 때도 있다. 인덱스를 하나하나 때고 옮겨적으며 읽을 때의 내 마음 상태를 추측해보며 하루하루 생각이 다른 나와 마주한다. 그렇게 조용히 문장을 노트에 다 저장해놓으면 지난 문장을 돌아보기도 하고 마음에 울림을 주는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문장을 통해 깨어난 나의 생각을 노션에 적어놓는다.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바뀌는 페이지의 내용은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 된다.


그리고 읽다가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단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쓰인 느낌이 드는 단어는 한 곳에 모아 사전을 검색해보고 실생활에서 한 번씩 사용해보려 노력한다. 그렇게 단어 역시 하나씩 모아둔다. 장을 보고 반찬을 해 식량이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면 뿌듯하듯 새로운 어휘를 열어보면 든든해진다. 내가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이렇게 많다니 놀랍다. 내가 정한 틀에서 내가 늘 하던 말, 하던 어투로 말하는 게 지루하게 느껴진다. 알을 꺠고 나오듯 다양한 단어를 쓰며 내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


독서목록도 정리해 둔다. 책은 책으로 연결된다. 마치 쇠사슬처럼 책 한 권은 책 한 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책은 다른 하나의 책을 불러오고 또 그 책은 다른 책을 불러온다. 책에 나온 도서를 독서목록에 넣기도 하고 작가의 다른 도서를 적어놓기도 한다. 이 목록은 도서관에 갔을 때 요긴하게 쓰인다. 다른 사람들이 빌린 도서를 기웃거리고 새로 나온 도서를 훑어봤는데도 읽어 보고 싶은 책이 없을 때는 독서목록에 책 중 아무거나 골라잡아 읽으면 된다.





사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지는 뚜렷한 목표는 없다. 그냥 밥을 먹으면 설거지를 하는 것처럼, 책상에 앉기 전 찻물부터 끓이는 것처럼 책을 읽을 때는 자연스레 위의 과정이 되풀이된다.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장 강박처럼 문장을, 단어를, 책을 저장하는 이유는 내 삶의 안전기지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술로도, 사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밤이 있다. 그런 밤에 필사노트를 펼치면 위로가 된다. 내 마음을 이렇게 꼭 맞게 알아주는 이가 있을 수 있을까? 노트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괜찮다. 쓰여있는 모든 문장이 나를 위로해준다. 적절한 구절로 나를 꼭 안아준다. 이 안전기지를 바탕으로 위로가 필요한 밤을 마무리하고 새벽을 맞이할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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