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서 걸어온 길과 마주하다.
“학교를 평생 다닌다고? 그걸 왜 해.”
진로를 결정해야 했던 고3 시절, 나의 선택지에 교사는 없었다. 이제 1년만 참으면 감옥 같은 학교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다시 자발적으로 학교에 들어간다니…. 아니 매일 출근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교사가 되어 매일 초등학교로 출근 중이다.
처음 발령을 받고 3개월이 지난 후 깨달았다. 이곳은 열심히 하려면 끝이 없는 곳이라는 걸. 하루하루 정신없이 신규 교사에게 떨어지는 각종 기피 업무를 하다 보면 정작 수업과 교실에 대해서는 고민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그리고 긴장하며 지냈지만, 새로운 장소는 아니라는 걸. 학교는 10년 전,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그 시절 그대로였다. 별로 다를 것이 없어 새로운 것도 없는 곳. 교사로서 내가 만난 학교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열심히는 했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게 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불평만 가득 남은 채 첫 학교를 떠났다.
“선생님, 어떤 학교 발령받으면 좋겠어요? 가고 싶은 학교 있어요?”
“그냥 시설 깨끗한 학교 발령받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 학교에 발령받기 전,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깨끗한 시설” 나는 ‘학교’라는 곳에 대한 기대가 없는 냉소적인 교사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정말 ‘시설이 깨끗한’ 개교 1년 차의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은 ‘서울형 혁신학교’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새 학년을 준비하는 2월, 동학년 선생님들과 마주 앉았던 첫 회의는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있다.
“선생님, 다른 업무도 있잖아. 이건 내가 할게.”
“그럼 이건 제가 할게요.”
처음이었다. 동학년 회의 시간이면 서로 눈치만 보는 침묵이 저 경력 교사였던 나를 향한 것 같아 억지로 “제가 할게요.”를 먼저 말하던 나였다. 누군가 자기가 하겠다고 먼저 나서다니. 그렇게 혁신학교를 처음 만났다.
하지만 혁신학교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왜 저렇게 다들 화가 나 있는지 궁금했던, 열기로 가득했던 다모임은 둘째치고 동학년 회의에 적응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아무리 1학년이라 해도 1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 매일 회의가 이어졌다. 교실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오후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일쑤였다. 긴 시간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매번 어리둥절했다. 동학년 회의와 내 수업은 별개가 되어있었고 나는 영혼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어느새 학부모 공개수업 일이 다가왔다.
‘어떻게 하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나는 다급해졌다. 그제야 회의에서 하는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 ‘발도르프’ 교육이 무엇인지, 교실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지,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늦은 새벽까지 고민하면서 ‘발도르프’ 교육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나도 두 아이의 엄마였기에 ‘발도르프’ 교육의 철학과 이야기는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다행히 학부모 공개수업은 잘 끝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수업의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진짜 수업 연구라는 건 이런 거구나.’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수업(을 고민하는 과정)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차 혁신학교에 물들어갔다.
내가 만난 첫 번째 혁신학교는 나에게 진짜 ‘학교’였다. 이곳에서 나는 다시 학생이 되어 처음부터 다시 배워나갔다. 다 배우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저, 중, 고학년을 골고루 하고 업무팀까지 하게 되었다. 저학년에서는 직접 움직이며 수업하는 방법을 배웠다. 중학년에서는 주제 수업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고, 고학년에서는 민주적으로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사실 배운 것이 너무 많아 한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마지막으로 업무팀에서는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 지를 배웠다. 업무팀에서 내가 맡은 일은 ‘교육과정’이었다. 내가 그동안 했던 교육활동이 ‘교육과정’이라는 문서에 이렇게 담겨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그전까지 교육과정은 그냥 형식적인 문서, 숫자 맞추는 일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 교육과정이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는 교육과정을 계획하는 일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새로 개교하는 혁신학교에 털컥 지원하게 되었다.
“선생님, 우리 학교에 대해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세요.”
동학년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이 있으면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새로 개교한 나의 두 번째 혁신학교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업무팀을 할 때든, 담임을 할 때든, 학년 팀장을 할 때든 5년 동안 ‘칼퇴’를 한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나는 학교에 열과 성을 다했다. 업무팀을 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0페이지부터 교육과정을 짰고(물론, 다른 혁신학교 훌륭한 교육과정의 도움을 받았다.) 학교의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 있는 그 과정이 참 재미있었다. 지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나를 보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나는 나의 두 번째 혁신학교를 정말 사랑했다.
그리고 참 미워했다. 시간이 지나고 규모가 커지며 내가 생각하는 학교와 달라지는 학교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내 생각이 답인 것처럼. 정답은 하나인 것처럼. 천천히 함께 가야 했는데 혼자 뛰다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누군가 함께 해주기만 바랐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바라보며 주변을 보지 못했다. 열정을 너무 쏟아부은 탓일까. 나는 오만해졌고 또 외로워졌다.
“선생님은 왜 학교에 안 남아요?”
“음…. 너무 좋아해서 그래요.”
다시 학교를 옮겨야 할 시기가 되었다. 혁신학교는 초빙 인원 비율이 다른 학교보다 높아 학교에 다시 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학교 밖으로 나와 한걸음 떨어져 보니 나는 곧 균형을 찾게 되었다.
또다시 세 번째 혁신학교를 만났다. 이곳에서 나는 어떤 교사로 살아갈까? 분명한 건, 불평만 하던 냉소적인 교사는 아닐 거라는 것이다. 나는 두 곳의 혁신학교를 만나며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주변을 조금 더 돌아보게 되었다. 주어진 상황에 낙담하고 외면하지 않으며 함께 목소리를 내던, 내가 혁신학교에서 만난 선배 교사들처럼 나도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