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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에서 발도르프를 만나다

by 러블리쌤

"발도르프? 어린이집 아니에요?"

육아 휴직 후 복직한 나는 처음으로 1학년을 맡았다. 기껏해야 5년의 교육 경력이었만 그동안 저학년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어린 두 자녀가 있었기에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도 1학년도 모두 처음이라 낯설고 어리둥절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또 이제 막 30개월을 넘어간 둘째와 유치원에 들어간 6살 아들을 하원시켜야 하는 엄마로서 하원시간에 늦을까 안절부절못하며 말이다.

1학년은 학년회의를 다른 학년보다 더 많이 하는 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닌가? 그 당시에는 3월 3주 정도를 1학년 적응기간으로 4교시만 운영했는데 어린이들이 하교하고 나면 매일 오후 1시부터 4시 30분까지(퇴근 직전까지) 학년회의가 이어졌다.

당시 먼저 시작한 혁신학교를 필두로 하여 여러 혁신학교에서 1학년 어린이들 수업으로 발도르프 학교의 교육과정을 배우곤 했다. 학기 초 적응활동으로 1학년에서 주로 하는 선 그리기 활동을 발도르프에서 진행하는 "형태 그리기" 활동으로 재구성하여 진행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1학년을 맡았던 선생님들 중에 발도르프교육을 해본 경험이 있는 선생님은 한 명도 없었으니 우리 회의는 언제나 뜬 구름 잡기였다. 작년 선생님들이 했던 자료를 보면서 하나하나 따라 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회의시간에 선생님들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교실에서 "형태 그리기"수업을 했지만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나에겐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동학년 회의시간이 너무 힘들다는 몇몇 선생님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나도 그랬다. 4시 30분에 회의를 끝내면 두 자녀를 하원시키기 위해 교실 정리할 새도 없이 퇴근해야 했던 나에게 3월 한 달은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게 회의는 일주일에 2번으로 줄여졌고 수업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나도 학교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발도르프? 왜 어떻게 하는 거지?"

마음속에 궁금증만 남긴 채.




어느새 5월이 되었다. 5월이 되면, 많은 학교에서 학부모 공개수업을 한다. 교사에게 수업을 보여준다는 건 나의 모든 것(표정, 말투, 수업스킬,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 등등) 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학부모 앞에서 수업을 한다는 건 더 그렇다. 그래서 학부모 공개수업은 1년 중 가장 긴장되는 일 중에 하나고 그만큼 잘 해내고 싶은 일 중 하나이다.


"우리 발도르프 수업을 적용해서 공개수업을 하면 어때요?"


한 선생님이 제안했다. 보통 학부모 공개수업에서는 각자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나 주제로 수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여러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민이 되었다.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 반, 쉽지 않겠다는 생각 반. 결국 나는 공부해 보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육아휴직 후 복직해서 흰 도화지처럼 모든 게 리셋된 상태였고 그것 말고 더 잘하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명의 선생님이 마음을 모았다. 시간을 더 내어 서로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부모 공개수업을 준비하려다 보니 더 구체적인 방법까지 이야기 나누게 되었고 우리의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서 실체가 보이는 이야기로 변해갔다. 집에서도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책과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며 발도르프 공부를 이어갔다.


드디어 학부모 공개수업 날,


'ㅁ'을 주제로 한 국어 주기 집중 수업. 수업은 생각보다 잘 되었다. 앞서 ㄱ~ㄹ까지 같은 흐름으로 수업을 해왔기에 어린이들과 호흡도 좋았다. 천천히 리듬감 있게 배우고 반복하는 발도르프 수업활동에 내 것을 조금씩 넣어 온전히 내 수업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수업을 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교직경력 7년 차에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어린이들과 호흡이 맞는다는 것.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치는지 이해하고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구나.


물론, 당시 내 수업이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발도르프를 정말 많이 공부하고 누군가가 봤다면 저건 발도르프교육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발도르프를 얼마나 알고 적용했느냐 보다 수업 준비를 하며 선생님들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그 시간, 그리고 내 것으로 만들어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이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였다. 수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건. 교사가 어떻게 수업을 준비해야 하고 수업을 해야 하는지 진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에 교사로서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아보고 시도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교사가 되어갔다. 하지만, 교육의 출발점부터 우리와 전혀 다른 발도르프 교육의 모든 것을 따라 할 순 없었다. 다만 발도르프 교육을 통해 배우고 실천하는 것들이 몇 가지 생겼다.


먼저, 리듬감 있는 생활을 통해 긴 흐름이 있는 배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린이들(특히 어릴수록) 생활에서 안정감을 느끼려면 리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루열기, 아침 시 외우기, 콩주머니, 마무리 시 외우기 등 리듬활동을 통해 반복되는 일상을 만들어 갔다.


책상을 밀고 교실에 동그랗게 모여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미소를 지으며 아침시를 외우고 다양한 몸 깨우기, 감각열기 활동을 한다. 하루를 마칠 때면 가방을 메고 일어나 마무리 시를 함께 외운다. 일주일마다 주간학습을 함께 보며 다음 일주일을 준비하고 한 달이 시작되면, 달력을 함께 만들며 새로운 달을 준비한다. 더 긴 흐름인 계절의 변화를 느끼도록 절기 산책을 꾸준히 하기도 했다. 또 한 학기가 끝나가면 한 학기 동안 했던 활동을 돌아보며 이야기 나누고 일 년이 지날 때는 학급문집으로 일 년을 정리했다.


하루의 일과를 정하고 일주일 흐름을 안내하고 달이 바뀌면 새로운 시와 만나며 어린이들과 우리 교실만의 리듬이 만들어졌다.


학년이 올라가 고학년이 되면 주말 이야기 나누기, 주제열기, 공책 만들기, 주제마무리(발표회나 전시회), 마침 시 외우기 등으로 변형하여 리듬감 있는 생활을 통해 깊이 있는 배움이 이루어지도록 애썼다.




두 번째로 가급적 매체를 통해 배우는 것을 지양하고 감각활동을 통해 직접 몸을 움직이면서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만들려는 것이다. 배움 공책에 직접 선을 긋고 글씨를 쓰며 나의 온몸을 사용하여 충분히 그리고 천천히 배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빈칸만 채우면 되는 학습지는 되도록 쓰지 않고 배운 내용을 함께 정리해 나가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양한 자극에 노출되어 있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이야기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어린이들이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였다. 먼저,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교실이 아름다운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형화된 미술 활동보다 교실을 함께 가꾸어나갈 수 있는 미술 활동을 하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 자연에서 만나는 작은 들꽃에 아름다움을 느끼길 바라며 그런 경험을 학교에서 채워줄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 매일 만나는 수업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린이들이 삶 속에서 자기를 둘러싼 것들의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감사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어린이들의 삶이 훨씬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발도르프를 만난 후 어떤 학년을 하든지 간에 어린이들이 하교하기 전에 함께 외우는 시가 있다.


오늘 수업을 마칩니다.
오늘 내가 배운 것은
내 마음속에 남아
지혜가 되고
사랑이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첫날에는 '이게 뭐지?' 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시를 읽어가던 어린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따뜻한 눈빛으로 힘 있게 외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모두가 큰 목소리로 이 시를 외우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시를 어린이들과 함께 외울 때마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오늘 교실에서 우리가 함께 한 하루가
어린이들에게 지혜가 사랑이 힘이 되어 주기를 말이다.





더 자세한 수업이야기는 블로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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