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종교는 없습니다만, 신을 믿어요.

의식의 흐름대로

by Breeze

내 영혼은 어렸을 적부터 ‘성경’을 펼치면 삶의 답안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을 통해서 내 답을 직접 찾아보겠다며 한 톨 두 톨 담아내고, 답을 찾았다 싶으면 지성인들의 답안지들 펼쳐서 비교하곤 했다.


2024년 10월부터 멘토이신 게리코치님의 초대 덕분에 성경필사 모임에 참여하면서 요리조리 도망치며 빠져나가던 에고를 성경 앞에 데려다놨다. 그리고 매일 묵상하여 오늘 여기까지 왔다. 내 영혼의 기억은 정확했다. 성경은 의식의 층위별로 닿는 구간이 다른 마법서 같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으면서도 한 인간의 안과 밖의 지도를 다 설명했다. 요한복음에서 신이 보내주신 그들, 신이 내게 주신 사람들을 멸망의 자식 이외에는 하나도 잃지 않기위함이시라는 고백은 심금을 울린다. 삶이 알려준 것과 같다. 내면의 나도, 외부의 너도 - 안과 밖은 같다.


인간이 궁금했고 인간을 좋아했고 친구들이 고민을 털어놓는 유갱맨이 가장 부러웠던 어린 시절의 나를 오늘보니 한결같다. 영혼의 주모님이 내게 건넨 '자네는 지구에 왜 왔냐'는 질문에 '사랑하러요'라고 툭 튀어나온 대답이 진짜임이 틀림이 없다. 사랑이 제일 재밌고 행복하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월급 주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내 BOSS도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어떤 직종의 일을 수행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이 근무 중인 것 같이 느껴진다. 커피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순간도, 친구와 여행을 가는 순간도, 딸 아이 손을 잡고 학교를 가는 순간도 모두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순간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러 지구에 왔고, 사랑하는 순간 나는 그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출을 받으려고 금리 조회를 해보면 현실이 자각되고 정신이 번뜩! 차려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현실이 꿈처럼 느껴진다. 무대 위의 연극 놀이 같이 말이다.


성경 필사를 함께하는 분들과 이른 아침 이야기를 나누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아들을 God에게 온전히 맡긴 성모 마리아님의 그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인간의 믿음을 초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God과 하나되어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합일이 되어계시고 본인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니 두렵고 아파도 받아들이실 수 있으실 것 같았다. 그러나 여느 부모가 그렇듯 '내 자식 대신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게 인간인데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을 감내하시는 성모 마리아님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투병 중이신 한 형제님이 말씀하셨다. 자신은 예수님이 육신의 어머니이시긴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고통은 못에 박히는 고통 보다 더 끔직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투병하는 고통은 그 때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투정이라고 느껴진다고 하셨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을 보며 못에 박힌 육신의 고통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셨으리라는 것을 새로이 헤아릴 수 있었다.

형제님 덕분에 새로운 관점을 얻으며 동시에 떠오른 기억이 있다.

결혼 전 예비 부부를 위한 수업에서 예랑과 예신에게 던진 질문이 있었다.

예랑에게는 '만약 어머니와 아내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요?' 였고, 예신에게는 '만약 아이와 남편이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요?' 였다. 남자에게는 '어머니' , 여자에게는 '아이'로 대상이 달랐다.

우리의 DNA에는 모든 역사적 기록이 담겨 있다고 한다. DNA를 조사해보니 먼 나라 외국인들까지도 역사적 계보에서 이어져 있는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십자가 사건에서 남자인 형제님은 아들이었던 예수님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느꼈던 고통을, 여자인 나는 어머니셨던 마리아님이 아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고통을 먼저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분리 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삶을 더듬어보니 그 한계를 마주해야만 했던 시간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반복되는 거짓 앞에서 마지막에는 우리 부모님은 모르게 해달라는 부탁을 그와 그의 부모님게 간절히 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계신 부모님이 잘 살고 있다고 믿는 둘째 딸까지 계속 되는 불행을 겪는 것을 보시면 너무나도 힘드실 것 같았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 성경을 펼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나의 힘으로 막으려고 애썼다. 그 시간의 끝에는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그저 힘을 빼고 다 맡겨버렸다. 신에게. 삶을 통해서 직접 답을 찾아보겠다는 의도를 세워서 그 뜻을 이루어주신 것처럼 성경을 읽어보니 다 이해가 되었다. '제 원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참 좋아하고 와닿는 구절이다. 잔을 거두어달라고 두려움을 진실되게 고백하면서도 끝은 God에게 맡기는 에수님의 기도는 인간으로서 참 많은 위로가 된다. 만약 성경에 예수님의 그 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나를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 었을 것이다.


내가 대신 짊어질 수 없는 병환이나 내가 원인이 되어 사랑하는 이가 고통에 빠진 것을 바라봐야할 때 그 아픔은 끔찍했다. 어쩌면 예수님과 마리아님이 겪은 고통의 파편들이 잘게 잘게 우리의 DNA에 기록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그 고통 속에서 삶을 God에게 위로 올려 드리는 Give UP (포기하다) 하는 것을 기억해내고 말이다.


내가 글에서 하나님, 하느님이라는 표현 대신 신 이나 God 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하나이신 신을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성당에서는 '하느님', 교회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창조주는 하나이신데 인간이 무엇이라고 부르든 신은 변함 없으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또 다른 분리를 낳는다. 그래서 여전히 종교는 없지만, 신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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