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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Feb 05. 2023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내용상의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볼 생각이 있으신 분들은 나중에 읽어주세요~!


 얼마 전 설 명절이 있었다. 평소 가까이하지 못하던 친척들을 보는 이 특별한 날들을,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외모 등 개인의 특징부터 시작하여 성적, 학교, 취업, 연애, 결혼 등 인생의 커다란 분기점이 발생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얹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로 권력관계에서 아래에 위치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큰 고통을 겪는데,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다. 불편하니 이런 이야기를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정중하게 말을 하든 감정적으로 상처받은 티를 내든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인데, 그걸 못 받아들이다니 너는 문제가 있다.’는 궁극기에 보통 이상한(더 심한 경우에는 나쁜) 사람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상대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은 마음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존재한다. 나도 이 점에는 동의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필요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조언은 제 인생에서 큰 문제를 막는데 효과적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큰 일을 결정할 때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두루두루 들어야 한다는 것을 늘 뼈저리게 느끼고 살고 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틀림없을 ‘잔소리’는 왜 폭력적으로 작용하고 결국엔 그 조언을 듣지 않는 사람을 ‘못되거나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쪽으로 변질되곤 하는 것일까?


폭력이란 단어의 정의부터 시작해 보겠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넓은 뜻으로는 무기로 억누르는 힘을 이르기도 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우리, 그리고 문제의 폭력적인 발언들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뱉고 마시는 분들이 일상에서 흔히 생각하는 폭력의 정의다. 그동안 이 정의에 따르자면 잔소리 정도의 ‘폭력성’은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물리력이 가해지지 않더라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분명히 존재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어폭력이라는 단어를 써서 ‘말로써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거나 욕설, 협박 따위를 하는 일’을 정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정의로도 ‘잔소리’의 문제를 짚어내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다. 여전히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나는 욕도 안 했고, 협박도 안 했는데 그게 무슨 폭력이니?’라고 말씀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화학에서 이야기하는 폭력의 정의를 조금 가져와보겠다. 평화학에서는 폭력을 직접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 세 가지로 나누어 다룬다. 앞서 언급된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폭력과 언어폭력이라는 단어는 평화학에서 이야기하는 직접적인 폭력에 해당한다. 이 직접적인 폭력이 나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 사회 구성원의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백이면 백 동의할 것이다. 두 번째인 구조적 폭력부터는 사람마다 생각이 많이 갈리곤 하지만, 그 부분은 우선 생략하고 다뤄보겠다. 가족, 국가, 국제사회등 사회의 뼈대를 이루는 구조가 그 구성원을 억압하고 해를 끼치는 경우를 구조적 폭력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법, 제도, 규칙, 정책뿐만 아니라 관습과 관례 등도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폭력은 사상, 철학, 예술, 과학, 종교, 전통, 담론, 언어등을 통해 가해지는 폭력과, 기존에 가해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잔소리의 폭력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바로 이 구조적, 문화적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다뤄볼 수 있다.


 먼저 모욕, 무시와 같은 폭력이 수반되지 않았다고 가정했을 때, 잔소리가 단지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해서 폭력이 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상대의 말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으니 그만하라’는 거절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가해진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1) 계급 혹은 권력관계 등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나는 대등하지 못한 관계를 형성하는 구조, 2)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대신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구조, 3) 2)에 의해서 약속된 가치에 대해서 옳은 말이기 때문에 반박해서는 안된다는 문화적 압박, 등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첫 번째, 관계의 문제다. 관계가 대등하지 못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나이, 계급, 출신, 경제적 위치 등 위아래를 나누는 사회 구조로 인한 경우,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한 사이라면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관계 자체에서 오는 불평등함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반복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에서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작용한다. 조이와 에블린, 에블린과 그 아버지 사이에는 동아시아 특유의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아?’와 같이 나이와 부모 자식 간이라는 관계의 특수성, 그리고 인정/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아 딸 조이의 여자친구를 ‘아주 친한 친구’로 소개해버리고 마는 에블린은 조이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딸이 표현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며 ‘너를 사랑해서 하는 소리다’라고 일갈하지만, 그 자신도 자신의 사랑을 위해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했을 때, 더 약자인 쪽이 굽힐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다. 서로 ‘계급장을 떼고’ 관계상 강자의 입장에 서있는 쪽이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세 사람의 관계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사회 구조상의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영화를 예로 들자면 에블린이 조이에게 문제 삼는 것들은 ‘외모(날씬한 몸)’, ‘동성 연인’, ‘대학교 중퇴’와 같은 것이다. 알파의 세계에서도 잠재력을 개화시키도록 한계까지 몰려 빌런이 되고 말았지만, 중간에 나왔던 골프복을 입고 있는 조이의 모습에서 유추해 보자면 다른 세계의 에블린들도 조이를 ‘엄친딸’로 키우기 위해 다양한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압력의 배경에는 사회적으로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있다. 더 예쁜 외모,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성적 지향과 정체성, 학력, 직업과 같은 것들은 이미 그런 기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개인에게 압력을 가한다. 그에 더해 ‘너는 왜 그렇지 못하니?’라는 잔소리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차이와 기호, 능력을 깡그리 무시하고 개인을 잘못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세 번째, 문화적 억압이다. 앞서서 언급된 사회구조가 개인을 문제가 있는 개체로 규정 지을 때, 가장 크게 개인을 상처 입히는 것은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억압에 대해서는 맞서 싸울 수라도 있지만, 각 개인이 이미 문화적인 학습을 통해 ‘상대가 맞는 말을 하고 있으니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자신을 방어할 최후의 수단조차 잃게 되는 것이니까. 실제로 에블린이 조이에게 몇 번씩이나 ‘건강하게 먹어. 너 살쪘어.’라는 말을 할 때 조이는 반박조차 하지 않는다. 이미 살찐 것=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상호 간에 전제가 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일 것이다. 실제로 주변에서 잔소리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맞는 말이니까’라는 이유로 반박하지 않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온 나로서는 이 문화적 폭력이 가장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럼 이 ‘잔소리’의 순기능만 남기고 폭력은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의 차원에서 실천 가능한 것은 우선 이런 것들이 있을 것 같다. 먼저 상대방의 의사표현을 존중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는) 예의가 필요하다. ‘네가 감히 반박을?’이라는 감정을 꾹 누르고,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일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이해해야 하겠다. 그리고 상대가 처해있는 상황을 고려한 발화도 중요할 것이다. 상대가 표현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기호, 감정, 능력, 차이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애써야겠지. 마지막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잔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잘 듣고 자신의 감정을 잘 헤아려 상대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그만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각 개인 별로 듣고 싶은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는 다 다를 텐데 표현하지 않고 이를 이해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사실 이런 것보다도 더 큰 것이 변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로 대화를 하는 구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문화가 사회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어떻게 보면 거들기만 한 영화 감상평이었다. 잔소리, 조건적인 사랑, 가족 안에서의 인정과 어린아이들이 노출된 가정 내 가스라이팅 등 많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기도 했지만, 눈이 즐거운 실험적인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 재미있는 스토리까지 다 갖춘 영화기도 했다. 혹시 보실 생각이 있다면 즐겁게 추천드리는 바이다.

 

(2024.6.4 일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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