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초보운전 문구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는 ‘초보운전’ 또는 ‘운전 연수 중’ 이런 식의 딱딱한 문구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재미있는 문구가 많아서 초보운전자들의 재치와 센스에 감탄할 때가 많다.
‘결초보은, 이 은혜는 꼭 나중에 다른 초보 분께 갚겠습니다.’
이 글의 포인트는 중간에 있는 ‘초보’이다. 재치도 있으면서 의미도 깊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초보 선배 교사’였던 나의 옛 시절이 떠올랐다.
쉽지 않았지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초보 교사’ 딱지를 떼고 ‘부장 교사’가 되었다. 서른한 살에 첫 부장이 된 나는 늘 정신없고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년이나 업무적으로 만나는 후배 선생님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다. 복 많이 받을 양반들.)
그 도움을 그냥 받을 수 없기에 나는 늘 식사 대접이나 작은 선물로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했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더욱 열심히 도와줬다. 선순환의 관계였다. 후배들하고 함께 일하는 것이 늘 즐거웠다. ‘아! 후배들한테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후배들과의 관계를 마스터 한 느낌이 들었다.(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작전 오늘도 성공.)
학교를 옮기고 같은 학년에서 새로운 후배를 만났다. 사소한 일 때문에 오해(?)가 생겼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며 잠을 설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배와 잘 지내고 싶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리 교실로 잠깐 불렀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오해가 생겼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과 잘 지내고 싶다’는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온 마음을 다해 전달했다.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은 교사 대 교사로 나누는 대화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당황했다. 사실은 그 후배를 부르기 전에 혹시나 실수할까 싶어서 비슷한 연배의 선생님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상의했다. 멘트 검사까지 받고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꼰대 선생님, 선 넘지 마세요.’였다.
서운하고 불쾌했다. 나의 고민과 노력 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후배 교사와 생긴 첫 번째 ‘트러블’이었기에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친한 선생님을 찾아가 그 후배 교사를 욕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후배 교사와 부딪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래, 나는 틀리지 않았어. 틀린 건 그 후배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미움을 합리화했다. 때로는 다소 찜찜한 승리감을 내심 즐기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결초보은’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떠오른 사람이 왜 하필 그 후배였을까?
아직 감정이 다 정리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 나는 ‘후배들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더욱더 위험한 것은 내가 정답이라는 생각이었다. 늘 인생의 정답을 찾아 살았고, 내가 선택한 그 정답을 증명해내기 위하여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몇 년의 숙성(?) 과정을 통해 ‘인생의 정답은 없다’라는 답을 찾았다. 게다가 굳이 그 정답을 증명해내면서 힘들게 살 필요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말 힘든 숙성 과정이었다.(숙성한 건 뭐든 비싸다. 나도 이제 몸값이 올라가는 걸까?)
숙성 후 나는 이제 그 후배가 나에게 준 깨달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늦었지만 사과하고 싶다.
“그 당시 좁디좁았던 나에게 더 넓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혹시 부족한 내 말투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합니다. 이 은혜는 꼭 나중에 다른 후배분께 갚겠습니다.”
마음이 후련하다. 출근할 때마다 가슴에 새긴다.
결초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