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퇴가 준 선물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수업을 못 할 정도는 아닌데 그렇다고 퇴근 시간까지 버틸 수 있는 몸 상태는 아니었다. 이런 날이 제일 애매하다.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면 고민 없이 연가를 낼 텐데, 그 정도가 아니니 연가를 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조퇴 후 링거 맞으러 가기.(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수업을 못 할 정도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런 무식한 인생이여. 선생이여.)


겨우 수업을 마치고 병원으로 향했다. 링거를 맞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갔다. 무선 이어폰을 꽂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거침없이 나에게 돌진하셨다. 재빨리 이어폰을 빼고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나 수원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혀? 차를 놓친 것 같어.”


이 역은 기존의 노선에 새로운 노선이 신설된 역이라서 기차의 행선지를 잘 보고 타야 한다.


“할머니, 다음 열차 타시면 갈아타지 않고 바로 가실 수 있어요.”


“아, 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기차를 놓쳤는데. 그럼 이다음 열차 타면 되는겨?”


“네, 할머니. 지나간 기차를 타고 가면 한번 갈아타셔야 하는데, 이번 열차는 한 번에 가는 거예요. 오히려 더 잘 된 거예요.”


“아 그려? 고마워요. 고맙네. 고마워.”


이제 도와드렸으니 이어폰을 다시 낄까? 고민이 되었다. 뭔가 더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할머니를 외면하고 이어폰을 다시 끼는 것이 어쩌면 무례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우물쭈물하게 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순간 고맙게도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기차에 올라탔는데 빈자리가 두 개. 조용히 집에 가고 싶었는데. 이를 어쩌나.


“아가씨. 일루 와. 언능 앉어.”


“아. 네네.”


갑자기 동행이 되었다. 할머니는 본인이 실수할 사람이 아닌데 실수를 했다면서 집에 가서 우리 아들한테 이야기하면 ‘그러실 분이 아닌데 왜 그랬냐’고 한소리 듣겠다면서 본인의 ‘똘망똘망’ 함을 나에게 무척 어필하셨다.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응. 나 팔십 셋이여.”


40대 내 인생에 이렇게 건강한 80대는 본 적이 없었다.


“어머, 저는 60대쯤 되시는 줄 알았어요.”


“그려? 고마워.”


할머니의 함박웃음이 마스크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런데 건강 비결이 뭐예요?”


요즘 부쩍 건강에 관심이 많아진 나는 진심으로 그 비결이 궁금했다.


“첫째는 많이 웃고, 둘째는 베풀고 살고.”


의외의 대답이었다. 소식이나 운동 등의 비법이 나올 줄 알았는데. 비결은 웃음과 나눔이라니!


“나이 들면 다 필요 없어. 예쁜 년, 돈 많은 년 다 저 세상 갔어. 안 아픈 년이 최고여.”


‘안 아픈 년’이 최고라니! 뭐야 오늘 나는 ‘아픈 년’인데! 건강한 80대 할머니 앞에서의 패배는 더 쓰라렸다. 병원 약 봉투를 내밀면서 할머님께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는 오늘 아픈 년인데, 할머니는 안 아픈 년이시네요!”


“하하하하하. 아프지 말어. 인생 살다 보면 당장은 진짜 큰 일 같은데 시간 지나가면 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말아. 아가씨도 너무 전전긍긍하면서 살지 말어. 많이 웃고, 많이 베풀고 그것만 혀.”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내 맞은편에 앉은 승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깜빡여 애써 괜찮은 척하며 할머니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할머니. 지금 보니까 100세 사시겠어요.”


“100세? 앞으로 17년이나 더 살라고?”


“네, 요즘은 100세가 유행이잖아요.”


“아 그랴? 그럼 한 번 나도 그래 봐야 겄네. 고맙네 그려.”


힘겨운 조퇴 길에 만난 비타민 같은 할머니였다. 건강한 모습으로 80대까지 건강하게 사시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새로운 용기와 도전을 얻었다.

몸이 좋아진 다음 날부터 바로 걷기를 결심하고 시작했다. 그러나 매일 운동하러 나가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부쩍 추워진 날씨, 빨리 어두워지는 하늘이 자꾸 핑계가 된다.


그럼에도 나를 벌떡 일으켜주는 한마디가 있다. 이 한마디에 당장 스마트 폰을 내려놓고 운동화를 신게 된다.


‘안 아픈 년이 최고여!’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결초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