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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비 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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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유쌤의 교실이야기
Nov 4. 2022
아침부터 우리 반 크세니아가 찾아왔다.
“선생님. 내일. 우리. 할머니. 학교에.”
크세니아의 한국어 말하기 실력은 아직은 좀 서툴지만 그렇다고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다.
“내일 할머니가 학교에 오신대?”
“네.”
“왜?”
“우즈베키스탄. 한국 처음 와서. 학교. 같이.”
“아, 할머니께서 한국 처음 오셔서 크세니아 학교 보러 오시는 거야?”
“네.”
“언제 오셔?”
“아침.”
“아, 할머니께서 아침에 크세니아 데려다주시면서 아침에 학교 구경을 오고 싶으신 거야?”
“네.”
크세니아는 ‘바로 그거야! 너 참 잘 알아듣는구나!’ 이런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에 처음에 온 크세니아의 할머니라.
“그러니까 ‘잇츠 퍼스트 타임’이라는 거지?”(갑자기 웬 콩글리시)
크세니아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크세니아 할머니의 첫 한국 방문. 그리고 한국학교의 첫 방문. 나는 마치 대한민국 홍보대사가 된 듯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굳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러시아어 인사를 해 드리기로 결정했다.(한복을 입기로 하지 않은 것이 다행)
“크세니아, 선생님이 쯔.뜨.라.뜨.브.이.쩨. 이렇게 인사드릴까?”
“네. 그게 아니고 쯔뜨라뜨브이쩨”
크세니아는 내 발음이 틀렸다고 정확하게 다시 바로 잡아주었다.
한글 철자대로 읽는 것이 아니었다. –S, -Z 같은 느낌의 억양을 한껏 더해야 했다.
세 번 정도 반복해서 크세니아에게 합격을 받았다.
“크세니아, 선생님이 러시아어 인사하고 나면 혹시 할머니께서 선생님이 러시아어 잘하는 줄 아실 수 있으니까. 꼭 인사만 할 줄 안다고 전해줘.”
“네.”
갑자기 한국 홍보대사로 변신한 나는 혼자 흐뭇해했다.
다음날 아침 러시아 인사말을 되뇌며 출근했다.
중앙현관을 지켜주시는 지킴이 선생님께 혹시 4학년 4반의 크세니아 할머니가 방문할 수 있으니, 의심하지 마시고 통과시켜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아, 이렇게까지 완벽할 일인가!
긴장된 마음으로 교실에서 크세니아를 기다렸다. 드디어 크세니아 할머니를 만났다.
“쯔뜨라뜨브이쩨.”
머뭇거리면서 인사드렸다.
예상한 대로 할머니는 내가 러시아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아시고 빠른 러시아어로 말씀하셨다.
나는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롭게 크세니아에게 말했다.
“크세니아, 선생님이 인사밖에 못한다고 말씀드려줘.”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그다음 대화부터는 크세니아가 통역을 했다.
“크세니아가 학교생활 정말 잘하고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착합니다.”
크세니아는 본인 칭찬을 본인 입으로 하는 것을 조금 부끄러워했지만, 할머니는 무척 흐뭇해하셨다.
“크세니아 어머님도 열심히 크세니아를 키우고 계십니다. 바쁘신데도 크세니아에게 좋은 경험을 많이 시켜주십니다.”
이내 할머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타국에서 고생하는 따님이 기특하기도 안쓰럽기도 하셨던 것 같다.
급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보내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뿔싸! 만나는 인사만 죽어라 외우고 헤어지는 인사는 준비를 못 했다.
완벽한 준비에 심취되어 있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쥐구멍 찾는다. 찍찍.)
“안녕히 가세요.”
한국말로 말씀드리고,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표현하고 싶어서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허리를 연신 굽혔다 폈다.
이 정도면 잘 가시라고 알아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도 눈치를 보시더니 나처럼 어색하게 인사를 하셨다.
어정쩡하게 인사했던 내 자세를 빨리 잊고 싶어서 양손을 엄청 빠르게 흔들었다.(아니야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이게 진짜 일리 없어. 뭐 이런 느낌.)
할머니께서는 계단 저편으로 멀어지셨다.
가을 단풍처럼 붉어진 얼굴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크세니아에게 헤어지는 인사를 물어봤다.
“다스비 다니아.”
“다스비 다니아. 이거 맞아?”
크세니아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내 엉덩이 인사를 비웃지는 않았겠지?)
잊지 못할 이별 인사다.
“다스비 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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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차 초등교사입니다. 살짝 웃기는 교직 에세이를 씁니다. 매일 학교에서 신선한 글감을 잡아올려 가심비 좋은 오마카세 같은 글들을 선물해드릴게요. 같이 웃고, 같이 성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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