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 얼굴에 웃음기가 있는 것을 보니 그래도 심각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안심은 했지만 그래도 싸움은 싸움인지라 상자 속에 숨어있는 스프링 인형처럼 연구실에서 바로 튀어 나갔다.
교실에 도착하니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런데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우는 아이, 씩씩거리는 아이, 웃는 아이가 뒤섞여 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초기 진압이 중요하다.
“모두 자리에 앉아, 다 엎드려.”
2시간의 전담 시간 후의 만남이었기에 일단 상황 판단을 위해 아이들을 모두 진정시켰다. 그리고 차분히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이 어수선한 상황에 관련된 아이들은 모두 5명이었다. 학생을 A, B, C, D, E로 칭하겠다.
시작은 A, B, C 학생들의 사소한 몸 장난에서 시작되었다. 몸 장난하면서 서로 놀면서 장난치다가 A, B가 C를 껴안았다. 답답한 C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A, B는 못 들은 채 계속 그 장난을 했고, 결국 C는 울음을 터뜨렸다.(C는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했지만, A, B는 못 들었다고 했다. 증인 확보 실패로 결국 이 부분은 확인 불가.)
그런데 갑자기 관련 없던 D가 나타나서 A, B에게 뭐라고 했고 결국 A, B, D의 싸움으로 번졌다.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E는 또 D에게 ‘네가 뭔데 나서냐며’ 일이 커졌다. 이렇게 일이 커지는 사이에 교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지켜보던 아이들은 각자 친구의 편을 들면서 A, B, C, D, E의 지지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은 진심으로 친한 친구 편을 드느라 바빴지만 어떤 학생은 이 싸움판이 그저 재미있어서 참여했다. 이건 뭐 일단 싸우고 보자는 학급 분위기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흠.
일단 A, B와 C를 사과시켰다.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은 제외하고 A, B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C도 처음부터 거부한 것이 아니고 본인도 위험한 장난에 처음부터 동참한 부분이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다음 D, E 학생을 불렀다. 사실 D, E 학생은 평소에도 이런 일로 나에게 지적을 받았었던 학생들이었다. 오지랖이 넓어서 어디든 참견하는 D 학생, 의로움을 화로 승화하는 E 학생.
어쩌면 사소하게 넘어갈 일도 D, E가 관여하면 일이 늘 커졌다. 때때로 D, E가 싸우는 일도 잦았다. 학급에서 일이 생길 때마다 D, E 학생의 오지랖과 의로움을 공감해주었다. 그러나, 그 해결 방법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고 늘 이야기해주었다.
‘너희들의 관심이 싸움이나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오지랖, 멋진 의로움이 될 수는 없을까?’ 나는 D, E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했고 부탁했었다.
그럼에도 오늘도 사건은 또 발생하였다.
문득 요즘 즐겨보는 ‘재벌집 막내아들’ 드라마가 생각났다.
재벌집 첫째 손자가 재벌집 할아버지의 고려청자를 깼는데 본인이 아니라면서 재벌집 막내 손자와 싸우는 장면이었다. 무척 비싼 고려청자를 깬 첫째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해 주신 말은 고려청자를 깬 일에 대한 꾸중이 아니었다.
‘너는 이 집 장손이다. 나는 오늘 네가 저 도자기를 깬 일을 가지고 혼내려는 것이 아니다. 이 일에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것을 꾸짖으려 한다. 모름지기 기업을 이끌어 갈 사람들은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나는 재벌집 할아버지처럼 통(?) 크게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너희들은 멋진 사람이 될 아이들이다. 나는 오늘 너희들이 친구들 일에 관여한 것을 혼내려는 것이 아니다. 반 분위기를 흐려놓은 것에 대하여 꾸짖으려 한다. 요즘 우리가 감사하며 누리고 있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우리 반 분위기는 선생님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만들어 놓은 것이고, 이렇게 함께할 시간은 고작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너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그 시간을 모두 깨뜨린 것이다. 앞으로 크게 될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시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도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친구들의 노력과 시간을 빼앗은 것에 대하여 정중히 사과를 해라. 오늘 선생님이 진짜 화가 나는 것은 이것이다. ”
어느새 두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체벌 없음. 눈빛도 꽤 부드러웠음.)
그리고 반 아이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얘들아, 너희들의 노력과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해.”
교실은 숙연해졌다.
사실 나도 다른 사람의 노력과 시간을 빼앗은 것에 대하여 사과시켜 본 것은 처음이다. 다만, 이 소중한 아이들과 지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운 그 마음을 담았을 뿐이다. 재벌집 할아버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하여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