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전하는 글’에 대하여 배우는 국어 시간이었다.
“얘들아, 이 세상에서 가장 손 편지를 많이 쓰는 사람은 누구일까?”
기습적인 질문 공격을 받은 아이들은 ‘저런 걸 왜 묻지?’라는 표정으로 처음엔 머뭇머뭇하더니 이내 제각기 창의적인 대답을 쏟아냈다.
세종대왕!
(정말 멋지신 분이긴 한데 손 편지를 많이 쓰셨는지는 선생님이 안 받아서 봐서 모르겠다. 미안.)
카카오 개발자!
(흠... 대국민 손 편지 쓰셔야 할 것 같긴 한데, 아직 안 쓰셨단다.)
마르쿠스 페르손!
(누구냐고 물었더니 마인크래프트를 만든 사람이라고 했다. 혹시 영어 손 편지를 가져온다면 인정할게.)
선생님!
(미안한데 선생님은 손 편지를 많이 받는 쪽이란다. 후훗.)
아이들과 신나게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새 손 편지를 많이 쓰는 사람들이 크게 세 개의 집단으로 정리되었다.(담임 닮아서 ‘아무 말 대잔치’를 무척 즐기는 편인데 저는 고급지게 ‘브레인스토밍’이라고 포장합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연인 사이, 친구 사이,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손 편지를 많이 쓰게 된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손 편지를 통해 표현하고 확인한다.
두 번째는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다. 예를 들자면 연예인이나 유명한 사람들이다. 요즘 말로는 인플루언서. 이들은 좋은 일이 있거나 큰 잘못이 있을 때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에게 직접 작성한 손 편지 사진을 SNS에 올린다.
세 번째는 사업을 좀 해 본 사람들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제품을 사면 포스트잇에 손 편지를 쓰고 사탕을 포장에서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 모든 쇼핑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택배를 뜯었을 때 고맙다는 정성 어린 손 편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사업을 그냥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업을 좀 해 본 사람들이다.
“사랑, 인플루언서, 사업 중에서 나랑 관련이 있는 단어가 있을까? 선택해보자.”
어떤 아이는 사랑, 어떤 아이는 인플루언서, 어떤 아이는 사업을 선택했다. 의욕이 넘치는 동민이는 셋 다 선택했다. 연애편지도 잘 쓰고 싶고, 연예인이 되고 싶고, 사업을 해서 부자도 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은 놀라운 제안까지 해버렸다.
“선생님, 그러면 우리가 직접 커플, 연예인, 사업가가 되어서 손 편지를 진짜 써보는 건 어때요? 우리가 나중에 그런 사람들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와 재밌겠다.”
아뿔싸.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사실 나는 이 정도 대화로 마무리하고 마음을 전하는 글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신나는 아무 말 대잔치(포장하자면 브레인스토밍)에 우리 반 아이들 창의성이라는 것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미 흥분한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의 미래는 어둠뿐이다. 저들의 창의성 뚜껑을 열어버린 것은 바로 나다. 피할 수 없다. 결자해지. 이것은 나의 숙명.
그 순간 나는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만큼 진지했다. 누군가는 수업 앞에서 이렇게 쓸데없이 비장해질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맞다. 나에게 수업은 비장한 일이다. 수업이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신다.(가끔은 치킨에 맥주)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괴감도 든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 참 괴롭다. 이 괴로움은 겪어 본 자만이 안다. 지금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수업은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GO!’를 외쳤다.
다음 국어 시간에는 각각의 콘셉트(?)를 잡고 감정이입을 깊이 해서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써보고 발표도 해보자고 했다. 신나 보이는 아이들의 표정으로 보니 ‘GO!’를 외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적인 수업 후 홀로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쉬는 시간에 동민이가 날 찾아왔다.
“선생님, 근데 다음 국어 시간이 언제예요?”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동민이도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다음 국어 시간이 기다려지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