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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년의 교육

 


 “선생님, 2주 뒤에 전학공 학년별 발표 준비하세요.”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분명 지난 3월에 전문적 학습공동체 학년별 발표회 따로 없다고 하셨는데!


  전학공은 거의 끝나가는데 이제 와서 학년별 발표회를 준비하라니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하니 바로 대책을 마련해야겠다 싶었다. 나는 우리 학년 전학공 담당교사니까. 책임감 앞에서 두뇌 회전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사진을 많이 찍어 둘 걸,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할걸.’하면서 나는 껄무새가 되었다. 핸드폰에 담겨있는 몇 장의 사진을 겨우 건져내고, 전학공 주제로 수업했던 자료들을 부랴부랴 찾아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발표할 때 당당하게 몇 마디 할 수 있겠다 싶어 안도했다. 그런데 영 마음이 찜찜했다. 발표 내용에 포인트가 없었다.(포인트가 없으면 못 견디는 스타일이라 언제나 인생이 좀 괴롭습니다.)


  문득 최근에 읽은 정김경숙 작가님의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라는 책이 떠올랐다. 같이 성장하는 친한 동료들의 경력을 모두 합치면 100년이 넘는다고 책에 자랑을 해 놓으셨다. 당장 동학년 카톡방으로 갔다.


  “선생님! 다들 경력이 어느 정도 되시는지 지금 바로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전학공 발표에서 우리 모두의 경력을 합산하면 어느 정도 되는지 자랑 좀 하려고 합니다.”


 “22년”

 “7년”

 “15년”


  역시 빠른 우리 동학년 선생님들! 카톡에 바로 이년 저년들이 올라왔다.(욕 아니고요. 웃기려고요. 워워. 화내지 마시고요.)


  핸드폰 계산기 앱을 열어 선생님들께서 보내주신 경력들을 다 합치기 시작했다. 일단 20년 넘은 분이 세 분이나 계셔서 60년은 거뜬하게 넘었다. ‘잘하면 100년 가까이 되겠는데?’ 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예상치 못한 108이라는 숫자를 만나게 되었다.


  108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고, 108배가 떠올라 웃었고, 마지막에는 뿌듯했다!


  ‘어쩐지! 올해 우리 학년 진짜 잘 굴러간다 했어! 역시!’


  온전히 내 경력도 아닌데 내 경력처럼 뿌듯했다. 그리고 전학공 발표에서의 포인트를 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드디어 발표 당일이 찾아왔다. 앞에서 우리 학년의 활동 내용을 소상히(?) 알리고, 이제 힘주어야 할 포인트가 찾아왔다. 일단 파워포인트에는 108이라는 숫자만 띄워놓았다.


  “올해 저희 4학년은 108년의 교육을 했습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발표 잘해 놓고 마지막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는 거지?’하는 걱정의 눈빛도 느껴졌다.


   “2022년 4학년 선생님들의 경력을 모두 합했더니 108이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어마어마하지요? 2022년 저희는 전학공을 통해 모든 것을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과정과 결과에서 108년의 내공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7명의 교사 중 1명만 본교교사, 5명은 전입교사, 그리고 1명은 신규교사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똘똘 뭉쳐서 함께한 결과 정말 행복한 한 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올해 학교 적응 도와주신 부장님과 서로의 학교 적응을 위해 애써주신 동료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눈물이 쏙 나왔다. 발표회가 끝나고 동학년 선생님들께서 정말 감동스러운 발표였다고 칭찬해주셨다.(이건 거의 자축 분위기!) 


  전학공 발표회 때문에 급조된 108년이었지만 우리의 한 해는 결코 급조되지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서로를 배려하면서 응원하면서 어렵사리 이끌어 왔던 우리들의 2022년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우리의 2022년은 정말 소중하다. 내년은 또 어떤 조합으로 몇 년의 연대가 이루어 낸 교육을 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졌다. 


  퇴근하면서 이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냉정한 남편은 그것은 경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 또 허를 찔렸다.) 2022년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난 것은 정말 큰 복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래도 난 108이라는 숫자가 참 맘에 든다고 초등학생처럼 대꾸했다. 


  이제는 남편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우리들의 108년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흡족한 사또 느낌으로) 108년! 네 이년! 참으로 기특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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