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학교 적응 기간에 활용하는 ‘즐거운 우리 학교’ 교재 뒤편에는 부록이 있다. 아이들이 부담 없이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주로 아침 활동 시간에 활용하는데 아이들이 꽤나 즐겁게 그리고 쓴다. 다 하고 나면 시키지도 않았는데 들고나와서 나에게 설명을 해 준다. 그런 아이들이 한두 명이면 괜찮은데 스무 명이 넘는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발표를 시키자 싶어 돌아가면서 발표를 시켰다. 실물화상기에 아이들의 결과물을 올려놓고 다 같이 감상하면 난리가 난다. 정답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들은 더 신나서 참여한다.
오늘의 주제는 ‘받고 싶은 선물’이다.
“자, 내 생일에 받고 싶은 선물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글로 써보세요.”
아이들은 마치 내일이 생일인 사람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민 중인 아이들의 모습에 교실은 파스텔 톤의 분위기로 물들었다. 작은 손으로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쓰고 그리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역시 이 맛에 1학년 하는구나!’ 싶었다.
한 명씩 나와서 발표를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그린 어린이, 포켓몬스터를 그린 어린이, 예쁜 옷과 신발을 그린 어린이 등 아이들은 다양한 선물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다.
다음은 민진이 차례다.
“제가 받고 싶은 선물은 엄마입니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음. 우리 민진이는 왜 엄마를 선물 받고 싶은가요?”
그냥 들여보낼까 하다가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아서 물어보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또박또박 발표를 한다.
“우리 엄마는 아빠랑 성격이 맞지 않아서 옛날에 집을 나갔기 때문입니다.”
순간 민진이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민진이의 표정을 살폈다. 또렷한 눈빛과 당당한 어깨. 조금의 부끄러움이나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텐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단 한 시간도 엄마랑 떨어지기 싫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던 입학식 날의 친구들과 민진이의 간극이 너무나 커 마음이 저려왔다. 민진이에게는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바로 정신 줄을 바짝 잡았다.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다. 일단은 울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할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음. 어. 아. 그랬군요.”
민진이의 손을 잡고 시간을 끌었다. 얼른 마무리하고 들여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민진이가 꼭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응원해 줘요! 그런데 꼭 엄마나 아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요즘에는 엄마나 아빠가 없는 가족의 모양도 많아요.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몇몇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진짜 엄마나 아빠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럼요. 선생님도 아빠가 없답니다.”
갑자기 생각난 15여 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말요?”
아이들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선생님! 맞아요. 나도 엄마 없어요. 그럴 수 있죠?”
갑자기 우진이가 외쳤다.
“아,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죠!”
“선생님! 저는 아빠가 없어요. 아빠 못 만나요. 그럴 수도 있죠?”
이번엔 효은이다. 대답해 주려는 사이 아이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저는 할머니가 없어요. 하늘나라 갔어요.”
“우리 집 강아지는 저번 날에 죽었어요.”
아이들은 갑자기 ‘상실’에 대하여 자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는데 자꾸 듣다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멀리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민진이의 모습도 보였다. 상실에 대하여 너무 무겁게 생각하고 내내 민진이를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너무 신나게 서로 자랑하는 바람에 내가 해주고 싶은 마지막 대답을 못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앉아 마지막 대답을 글로 적어 본다.
작지만 단단한,
단단하지만 엉뚱한,
엉뚱하지만 도담도담
자라나는 나의 아이들아.
인생은 그럴 수도 있어.
언제나 그럴 수도 있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