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늘 6월에 시작했다

by 민하

어둠이 짙게 깔린 공간, 높은 천장 아래로 하얀 천들이 축축 늘어져 있다.

늘어진 천 사이로 조심스레 한 걸음 옮기자,

천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살아 있는 생명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미주 주위를 둥글게 감싸더니 시야를 가려 버렸다.

살갗에 닿을 듯 말 듯 축축하게 밀려오는 하얀 천.

그 감촉에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스치자, 천들은 서로 부딪히며 마찰음을 냈다.

그 틈새로 보이는 희미한 여자의 그림자.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자, 닿을 듯 말 듯 멀어져 갔다.

실망한 듯 손을 거두는 순간, 또다시 나타나 그녀의 곁을 천천히 맴돌았다.

다시 손을 뻗으려는 찰나, 갑작스러운 바람이 몰아치며 천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눈앞이 환하게 트이자 본능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순간, 낭떠러지 절벽 위 바다가 펼쳐졌다.

그 아찔함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고 다리는 점점 힘을 잃었다.

끝내 주저앉아 미주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삐삐삐, 삐삐삐”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 천장 등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 휴대폰의 알람을 끄고 멍하니 앉았다.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후…, 또 6월인 거야?”


익숙하면서도 담담하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은 달력을 찾았다.

어린 시절, 언제부터 인지 이 꿈이 시작되면 6월의 시작을 알렸고, 한 동안 이 꿈속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악몽,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6월의 시작이었다.


“좋은 아침”


사무실 문을 열고 젖은 우산의 물기를 털자 코끝으로 커피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젖은 비옷까지 벗어 물기를 털어내자 꿉꿉했던 몸이 한층 개운해졌다. 옷걸이에 비옷을 걸고 사무실 벽을 반 넘게 차지하는 넓은 창으로 다가갔다.


“선배! 오늘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어제 넥플렉스 시리즈 달리신 거 아니죠?”


사무실 후배인 다영은 특유의 상큼한 목소리로 한 손엔 미주가 좋아하는 따뜻한 라테 한잔을 가지고 와 건넸다.


“뭐? 내 안색이 그렇게 좋지 않아? 장마가 시작되어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지는 것 같아. 빨리 이 장마가 끝났으면 좋겠어.”


건네는 라테를 받으며 비 오는 창밖을 내려다봤다.

며칠째 계속 내리는 비로 거리는 조용했고 몇몇 차들만 지나갈 뿐이었다.

직원들이 키우는 죽어가던 허브 화분만, 비를 맞고 다시 새 생명을 얻어, 파릇파릇하게 커 가고 있었다.


“맞아요. 무슨 비가 며칠째 계속되는지…, 저희 촬영 스케줄 7월로 전부 미뤄졌어요. 장마 끝날 때까지 촬영 스톱이에요. 완전 스톱.”


다영은 미소 띤 얼굴로 양팔로 엑스자를 그리며 신나 했다.


“다영 씨? 많이 신난 표정인 걸?”

“제가요? 무슨! 전혀 아니에요. 촬영이 미루어져 슬퍼하고 있는 참이에요. 제 눈에 이 눈물 보이시죠? 참! 그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서준 선배가 일주일째 연락이 안 되나 봐요. 「라이트하우스」 지금 난리 났어요.”

“뭐?”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다급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휴대폰을 찾았다.

그때 마침 미주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미주야, 너 서준이랑 언제 통화했어?”


다그치듯 묻는 서희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이 녀석이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통화가 안 돼”


울먹거리는 서희의 목소리가 전화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다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급하게 전화를 끊고 우산과 비옷을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선배님! 어디 가세요?”


어리둥절해하는 다영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미주는 기차 창에 기대앉아 흐릿하게 번져 가는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 보이는 풍경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쓰러지기 직전의 서희 얼굴이 떠올랐다.

서준은 부산에 도착해 흰여울마을에서의 마지막 통화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가끔 미스터리한 취재를 위해 연락이 닿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2~3일쯤 지나면 연락이 되어, 이번에도 ‘그러겠지’하고 넘겼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닿지 않자 이번엔 뭔가 다른 것 같아 불안해했다.

그 말을 들은 미주는 작년 6월 서준과 함께 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일주일 지방 촬영으로 서준의 회사 「라이트하우스」와 미주의 회사 「별빛아틀리에」 촬영팀이 각자 짐을 꾸려 거제도로 내려가는 일이 있었다.

촬영기간 내내 해무가 나타나 무척 힘들게 진행된 촬영이었다. 거의 모든 촬영 일정이 끝나고 마지막 남은 새벽 바다 촬영을 찍을 때였다. 그날도 해무가 자꾸 생겨 현장에서 촬영이 계속 미뤄졌다. 해무가 사라지길 기다리며 쉬는 틈, 그 틈에 미주에게 익숙한 그 꿈이 찾아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 거리던 자신을 서준의 당황한 목소리로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 꿈속에서 헤매는 자신을 깨워 준 건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준은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가져와 미주에게 건네주며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 따뜻함에 해무가 그쳐 사라질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어린 시절부터 괴롭히던 그 꿈, 그 꿈속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며칠 뒤 촬영팀이 서울로 복귀한 어느 저녁, 미주는 야근으로 어두운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고 서준이 찾아왔다.


“미주야…, 아직 일해?”


퇴근 복장 그대로, 비라도 맞은 듯 어깨가 조금 젖어 있었다.


“어? 왔어? 촬영 끝났는데…,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미주가 놀라며 웃자, 서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어떡하지? 난 지금 편집 중이라 나가서 먹을 시간은 안 되는데?”

“그럼 뭐라도 시켜서 먹을까?”

“그래”


배달을 시키고 저녁이 도착하기 전까지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저녁을 다 먹고 난 뒤 익숙하게 커피를 챙겨 오던 서준이 말문을 열었다.


“… 그날, 거제에서 네가 꾼 꿈 있잖아.”


미주는 눈을 깜빡였다.
서준이 꿈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라 놀란 얼굴이었다.


“그때는 그냥…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더 묻지 않았는데…”


서준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밀었다.


“괜찮으면… 조금만 얘기해 줄래?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
표정은 어딘가 신중하고, 복잡해 보였다.


“너한테 어떤 기억이 남아 있는지…, 그걸 알고 있어야, 혹시 또 그런 꿈꾸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서준 특유의 배려가 묻어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아주 미세하게, 무언가를 잡아내려는 호기심도 비쳤다.

미주는 머그컵을 받아 들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람이 불고…, 해무가 깔리고…, 늘 6월이었어. 그리고… 하얀 천 같은 게 나를 둘러싸고…”


말을 이어가자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듣기만 했다.
불쑥 묻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자 서준은 창밖 어두운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6월…, 해무…, 반복되는 이미지네.”


그러곤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웃었다.


“아, 직업병 나왔다. 미안. 그냥… 네가 그동안 얼마나 혼자 버텼는지 알겠어서.”


말은 그렇게 마무리했지만 미주는 모른 채 했던 것들을 서준은 이미 마음속에서 연결하기 시작한 듯했다.

그날 이후 서준은 별말 없이도 해무, 바다, 흰여울 같은 단어가 들리면 잠시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그는 그다음 해 6월이 시작되는 날 아무 말 없이 혼자 부산행 기차를 탔다.


‘그때 그 일 때문일까?’


미주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택시가 마을 입구에서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내리자 바닷바람과 함께 낯익은 냄새가 밀려왔다. 짠 내, 젖은 바위, 식지 않은 땅 냄새. 한 걸음 내딛자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흰여울마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스스로 돌아왔다. 와야만 했다.

미주는 우산을 펴고 비옷을 여몄다. 비는 여전히 잦아들 기미가 없었고 해무는 낮게 깔려 골목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기억보다 더 좁고, 더 조용하네…”


그녀는 좁은 골목을 따라 예전 살던 집으로 내려갔다.

마을 끝, 절벽 가까운 곳.

골목에서 벗어나자 그녀가 한때 살았던 집이 덩그러니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낡고 녹슨 철문은 떠날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벗겨지지 않은 녹색 페인트 위로 이상한 낙서가 보였다.


「보지 마. 들리면 안 돼.」


어린 시절 아이들과 같이 장난 삼아 골목 벽에 썼던 낯익은 누군가의 글씨체였다.

미주는 숨을 한 번 삼키고 철문을 밀었다. 낡아서인지 습기를 먹어서 인지 철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밀자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비틀리 듯 열렸다.

우산을 접고 고개를 숙여 안으로 들어서자 마당이 보였다. 마당은 미주가 나온 그날 그대로 남아있었다. 엄마가 애지중지 아꼈던 텃밭은 잡초들로 무성했고, 집을 고치기 위해 한쪽에 쌓아둔 공사 자재들은 먼지와 빗물로 젖어 있었다. 한쪽 수돗가엔 빗물이 가득 찬 대야와 망사리가 널 부러져 있었다. 마당 중간에 걸린 빨래 줄엔 빨래집게 하나만 덩그러니 빗물에 흔들렸다. 모든 것들이 그 시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주는 가방을 뒤져 현관문 열쇠를 찾아 꺼냈다. 잠깐 손에 묻은 땀을 옷에 닦고 열쇠를 꽂았다.


“덜컹…, 덜컹….”


몇 번 돌리자 툭 하고 잠금 쇠가 풀렸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의 해무도 문턱까지 따라와 있었다.


현관에 서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집 안까지 따라 들어온 해무는 문턱을 넘자 조용히 깔리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은 푹 꺼져 있었고 군데군데 벗겨진 벽지는 비에 눅눅해져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쉽게 뜯겨 나갈 것 같았다. 발 옆에는 오래된 슬리퍼 한 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뜯어진 고무창이 가볍게 흔들려 마치 누군가 방금 전까지도 신고 있던 것 같았다.

현관 옆 낮은 신발장 위엔 깨진 유리 액자가 엎어져 있었다.

손을 들어 세우자, 깨진 유리 조각 틈 사이로 물이 번져 반쯤 얼룩진 사진이 드러났다. 모두가 웃고 있는 표정 같았지만, 그 모습이 미주에게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득해 보였다.

시선을 주방으로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걸린 낡은 국자, 손때가 벗겨져 반짝이는 수납장 손잡이, 싱크대 안에는 깨어진 머그잔 두어 개와 빛바랜 행주 한 장이 물때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한쪽 찬장은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날짜가 지워진 참기름 병과 바닥이 보이는 양념 통 그리고 노랗게 변색된 편지 봉투 하나가 보였다. 미주는 손을 들어 편지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봉투를 집어 들지 않았다. 열어보지 않아도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거실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소파 위에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들이 한쪽으로 자리 찾지 하고 있었다. 건너편 벽에는 작은 벽걸이 달력이 걸려 있었다. 달력은 시간이 멈춘 채, 그때 그 달에 멈춰 있었다. 그 누구도 페이지를 넘길 용기도, 떼어낼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미주는 그 달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순간 바람이 살짝 스치자 방문이 삐걱거리며 조금 열렸다.

작은 방 안에는 빛바랜 수건들이 마치 어질러진 물건들을 덮듯 이불처럼 널려 있었다.
장롱 위엔 구멍 난 구겨진 비닐봉지 사이로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상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집 안 가득 밴 젖은 곰팡이 냄새와 머리칼 끝을 간질이는 먼지들, 조용히 그때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집 공기들이 무겁게 미주를 누르는 듯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톡…, 톡…”


거실 창문 너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주는 조용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물방울 소리는 점점 커져 장마 비 소리로 바뀌었다. 점점 더 조여 오는 갑갑함에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뭔가에 쫓기듯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잠깐 멈칫했다.


‘반짝’


그건 분명, 들어올 때 보이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공사 자재들 모퉁이 사이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작은 노란 방수 케이스, 그 위엔 젖은 종이쪽지가 얹혀 있었다.


2024. 6. 03 월요일

오후 6시 36분
기록 중, 해무 짙음


서준의 글씨체였다.

떨리는 손으로 케이스를 열자 안에는 작은 소형 캠코더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