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 살아남기(4)

선을 그을 수 있는 자유

by 주인공

코로나로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귀국할 때

내가 이곳에서 더 버텨야 하는 이유를 고민해본 적이 있다. 위험을 피해 한국으로 갈것인지 아니면 남아야 할것인지 두갈래 길에서 나는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타국에서 직면한 Covid-19.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돌아가야 할까. 이곳에서 좀더 견뎌보아야 할까에 대한 갈등은 나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치게 만들었다. 결정장애는 단순히 결정을 못 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에너지를 분산시켜 체력과 정신력을 야금야금 빼앗아갔다. 내 일생 처음 겪는 팬데믹! 매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만 수없이 반복한 나날. 아마 지난 2년 동안 이곳에 있는 외국인들은 나와같은 고민을 수도없이 했을 것이다. 실제 자기 나라로 돌아간 외국인도 많았고 한국인 가운데도 이곳 생활을 정리하는 분도 많았다. 전 세계에 닥쳤던 위기. 전세계를 강타한 역병!


나는 남기로 했다. 그러나 결정을 하고 나서도 마음은 영 잡히지 않았다. 잠도 오지 않던 날도 여러 날. 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꺼내 들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좋은 점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관계" 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집안에 갇혀 외로움에 치를 떨면서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거리두기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코로나로 매일 최악의 상황을 각오해야 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내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이곳에서의 삶도 한국에서의 삶의 연속이기에 한국과 완전히 분리된 관계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한국처럼 빠르지 않아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나도 느린 속도에 적응해갔다. 때로는 왜 그렇게 급하게 쫓기듯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낯선 환경. 낯설어서 오는 두려움은 긴장감을 제공하지만 소소한 것들에 익숙해지고나니 그것에 안도와 기쁨을 느끼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에 20프로도 적응하지 못한 시점에 코로나라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그대로 어벙 벙. 설상가상 lock down 선포가 된후 국경은막히고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니 '어?이거 뭐지?어떻게 되는거지?'생각뿐. 물리적인 락다운은 내 정신과 사고도 락다운 시킨 듯 했다. 동네 산책도 허락되지 않는 생활에 무척 당황했던 듯 하다.


이런상황에서 나는 왜 '관계'의 문제를 떠올린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동안 정신없이 달리느라 놓치고 있던 나의 감정들과, 어쩔 수 없이 엮어 있던 관계를 깊이 들여다 보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지켜야 하는 관계의 진정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은 탓일까 아니면 성격 탓일까. 어느 순간 나는 점점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굳이 맞지도 않는 사람에게 맞추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억지로 맺은 인연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몇 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이미 터득했다.


타국 생활의 고충, 외로움, 향수병 등 경험할 수 있는 있는 복잡 미묘한 온갖 감정들을 이곳 말레이시아에서 겪게 되었지만, 그러한 감정들 속에서 오히려 얻은 것도 있었으니 바로 '관계의 정리'이다.


일부러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레이시아에 오게 되면서 그동안 자연스럽게 끊어내고 싶었던 피곤한 관계들이 의도치 않게 정리가 되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아~속 시원하다'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었지만...'이 사람은 나를 이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서운함이 느껴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껏 내가 착각하고 있던 관계의 깊이도 깨닫게 되었다.


관계라는 것이 참 오묘한 것인지라...

가깝다고 생각했다가도 별것 아닌 일에 등을 돌리기도 하고,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별로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벅찬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인간의 관계가 항상 기브 앤 테이크만은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관계의 한 축에는 늘 기브 앤 테이크가 함께 한다는 것도 터득하였다.


때로는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배려를 받기도 했다. 그게 인간관계의 묘미라면 묘미이자 아이러니이다.


어렸을 때는 이 나이쯤 되면 관계의 문제에서는 어느정도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나보다. 여전히 일보다 더 힘든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을 사실을 매일 깨닫고 있으니..


말레이시아에 와서 굳이 한국인들을 찾아다니며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이유가 컸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것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나게 관계 외에는 굳이 억지로 필요에 의한 관계들을 만들지 않았다.


그간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부대끼며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이곳에서는 굳이 한국의 연장선에 있는 복잡한 인간관계는 사양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가 필요할 때는 득달같이 연락해서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사람, 정말 칼 같이 기브 앤 테이크로 모든 관계를 재단하는 사람, 상대방을 은근히 무시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즐기는 사람, 자신은 하나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면서 상대방은 자신에게 무한한 관용을 베풀기를 바라는 사람, 약한 사람에게 강하고 강한 사람에게 약한 사람, 자신의 무능함을 늘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 편 가르기를 하며 남을 이간질 하는 사람, 남의 일에 대해 충고랍시고 당당하게 상처 주는 사람..


사회생활을 하면 당연히 겪게 되는 과정일 수 있으나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수일지라도 나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마음이 지치면 바로 몸으로도 그 이상이 전이된다. 나도 그랬다.


인간관계에서 가짜를 걷어차 내고 진짜만 취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게 그리 쉬우면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를 왜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겠는가.


살아가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대하는 사람,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생각지 않고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강요하는 자기 말만 하는 사람. 이 부류는 확실한 가짜. 가짜들을 쳐내면 된다. 그러나... 절대 쉽지 않다. 그게 함정.


누군가를 알게 된 시간과는 상관없이 생각이 통하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분 좋은 사람, 나이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 어설픈 충고를 하기보다 잘 들어주며 공감해주는 사람. 이들은 진짜다. 진짜와 가짜 구분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어려울 뿐.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몸은 힘들고 지쳐도 마음은 고요해질 때가 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은 힘들지만 또 이렇게 예상치 못한 자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 방심할 경우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마음이 다치곤 한다. 이건 여러 번 경험해도 매번 처음인 것처럼 아프고 시리다. 오늘 나는 또 그것을 경험했다. 것도 오늘 처음 본 친한 척하는 한국인 아주머니에게ㅜㅜ)


타국 생활의 장점 중 하나는 나이에 대해(상대방의 나이이든, 나의 나이이든) 한국에서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한국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나이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그건 수십 년 동안의 익숙한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것이기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무의식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규범과 가치관들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더라..


어디에나 못된 인간들은 있고(진짜 못된 인간들은 어디에나 꼭 있더라!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더라. 여기도 그렇다)

어디에나 다른 사람들 뒤통수치는 인간들도 있더라. 말레이시아, 이곳이라고 다르겠는가. 다만 아주.. 조금.. 살짝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뿐. 그 선을 지키는 것이 내가 이곳에서 평화롭게 사느냐 아니면 복닥거리며 사느냐를 결정짓는다. 맺고 싶지 않은 관계의 선을 그을 수 있는 곳. 나는 그것이 이곳 생활에서 가장 좋은점이라 생각한다. 지금 나의 상황에서는 말이다.


선을 그을 수 있는 자유.

즐기자. 일시적인 이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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