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 맞을 때는 가만히
가만히 좀 있어라~가만히
하나도 안 아프잖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아이가 지난주 금요일에 A형 독감에 걸렸고 수액을 맞고 주말 동안 되도록 조심히 지냈다. 외식을 하러 가던 일요일 저녁에 멈출 줄 모르는 재채기에 으슬으슬 추워지길래 문을 연 약국에서 비염 알레르기 약을 샀다. 이번엔 나인가. 저녁을 먹으며 입 속으로 바로 털어 넣었다. 다음날 월요일 오전, 몸살 기운이 점점 강해졌다. 병원에 바로 가볼까 하다가 해야 할 업무들을 모두 끝내고 쉬고 싶었다. 오후 세 시 즈음에야 아이가 독감 확진받고 진료했던 소아과로 향했다. 지난주에는 대기자가 많았는데 이 날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역시나 나도 A형 독감. 아이에게서 옮았나 보다. 결과를 보자마자 수액을 맞겠다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장판이 뜨뜻하던데 그 위에서 몸 좀 지지며 쉬어야겠다. 잠 좀 청하면서. 손등에 수액을 꽂은 채 간호사를 뒤따라 안내받은 방의 미닫이 문 너머에는 두 가족이 있었다. 여자아이와 엄마 그리고 남자아이와 아빠. 여자아이의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눈을 거두었고, 남자아이의 아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들을 뒤에서 안고 있었다. 안쪽 구석 빈자리에 몸을 누였다. 아.. 병원 대기실 TV 만화에 빠져있는 아들에게 말을 못 했네.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는데 왜 안 오냐고 해서 바로 따라가느라 아들에게 상황을 전하지 못한 것이다. 알아서 찾아오겠거니. 이마에 손등을 올려 쉴 태세로 돌입했다.
여자 아이는 수액을 거의 다 맞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다시 와서 바늘을 빼고 이후 조심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설명했다. 지난주에 나도 들었던 내용들을. 그들이 떠나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좀 있어라~가만히.
하나도 안 아프잖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수액을 맞는 20분 정도 저 말을 들었다. 아이가 가만히 못 있나? 슬쩍 보니 아이는 아빠의 팔에 결박된 채로 하나의 유튜브를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 오른손을 스마트폰에 터치할 때 움직임, 그것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1분 간격으로 말하기에 아빠가 참을성이 없구나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귀도 닫고 싶었다. 신경도 끊고 싶었지만 계속 들려오는 큰 언성에 자연스레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음.. 아까 수액 주사실에서 들린 엄청난 울음소리의 주인공인가. 아이 수액 맞는 건 대체 언제 끝나나 아빠의 심정이 되어 기다리게 되었다. 나중에 간호사들이 와서 ‘가만있지를 못하니 맞는 게 힘들었겠다’는 말에 손을 보니 테이프가 남들보다 많이 붙어있었다. 아이는 여러 어른들에게 타박당하며 자리를 떴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아프면 예민해지지. 아까 진료 대기하는 동안 어린 여자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주사를 끝까지 안 맞았는지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라며 지금 안 맞으면 나중에 네, 다섯 번은 맞아야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 뒤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남자아이 아빠처럼. 가만있던 남동생에게도 불똥이 튀어 주사 협박을 했다. 둘째는 무서워했지만 첫째 아이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인상만 쓸 뿐 아무 대꾸가 없었다. O씨네 고집 이랬지만 그 고집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아들이 나를 찾아왔다. “엄마 여기 있었어?”, “응, 급하게 오느라 말을 못 했네~” 아프냐고 묻는 아들에게 조금 아프다고 답했다. 할 게 없다기에 책가방에 챙겨 온 만화책과 장난감 총을 들이밀었지만 보기만 할 뿐 다시 나가버렸다. 아침에 아들에게 한 말과 행동이 생각났다. ‘같은 말을 여러 번 해도 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나는 이 말을 반복한다. 좋게 좋게 이야기해도 하질 않으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참고 기다려도 보지만 시간은 가고 학교 가야 할 시간에 가까워지고 그런데 준비는 하지 않고. 결국 아침에 같은 소리를 여러 번 하고. 병원에서 본 할머니와 아들 아빠,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인 거다.
저녁은 시켜 먹기로 결정하고 병원을 나서는데 아이는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계속했다. 편의점에서 3,000원짜리 사탕 사달라고 조르기, 치킨 시켜 먹자고 하기, 집에 돌아온 이후 계속 티비 보기. 결국 나는 협박했고 아이는 울었다. 티비와 패드만 있으면 너는 살 수 있겠다고. ‘다른 아이들이 2, 3, 4학년 성장해도 너는 성장할 수 없다고. 계속 머무를 거라고.’ 무섭게 말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안 할 거야~” 했다. 아이는 내가 아프면 평소에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맘껏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생겼다고 여기며. 배달 음식 시켜 먹고, 티비 보고. 숙제는 하지 않는다.
아프니까 쉬면 되지. 아플 때는 어쩔 수 없지. 그렇지.. 뒤늦게 드는 생각에 아이에게 걱정되는 마음을 전하고 함께 일찍 잠들었다.
아프니까 좀 쉴까?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와 머리카락, 먼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설거지와 빨래가 산더미다. 배도 고프다. 일단 밥은 먹어야겠어서 누룽지를 끓였다. 딱딱한 누룽지가 풀어지는 동안 물건 정리를 했다. 마음이 심란하면 필요 없는 물건부터 버린다. 물건을 비우면 마음이 좀 낫다. 어질러진 방안을 깨끗이 치우고 물건이 비워진 공간만큼 내 마음의 여유도 생기는 기분이 든다.
오늘까지 푹 쉬면 내일 나아질 테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졌으니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