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애 Mar 03. 2022

잔이 비면 채우듯

누군가의 일상




소주가 없는데. 뭐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사 올까. 어. 신발장에서 크록스 샌들을 신고 에코백을 챙겨 나왔다. 화이트 세 병에 육포 하나, 콜라 한 캔. 봉투 50원인데 필요하세요? 아뇨. 삑삑. 바코드 찍는 소리가 끝날 때마다 하나씩 가방에 집어넣었다. 학생 같은 앳된 아르바이트생의 땡그란 눈을 마주하며 인사했다. 에스닉 에코백에 소주를 담아 나왔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소주를 사러 나왔다. 봉투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빈 손으로 왔구나.. 패딩 양쪽 주머니에 소주를 넣고 육포를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 돌아왔다. 우리 집 동이 점점 가까워지니 앞으로 마주칠 (얼굴도 모르는) 이웃주민이 떠올랐다. 아차차.. 그다음부터는 장바구니를 꼭 챙겨갔다.





하지만 저녁마다 소주를 사러 나가는 길은 귀찮은 일이었다. 아이와 매일 장을 보러 가는 대형마트에 한 날은 웨건을 끌고 가서 소주 한 박스를 사 왔다. 나오는 길에 아이와 횡단보도를 건너고는 이내 멈췄다. 잠시만 기다려 봐. 가방 속 장바구니를 펼쳐 박스를 덮었다. 박스가 비면 새로운 박스를 사야지.





아이와 많이 부대낀 날 누가 타 준 커피가 마시고 싶어 아이가 학원으로 가자마자 집 앞 커피숍을 찾았다. 아이스 바닐라라테 주세요. 우유를 따르는 점원의 등을 보다가 눈길을 돌렸다. 얼마나 걸릴까. 신호가 바뀌기 전에 다 될까.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중 모녀지간 같아 보이는 두 여성이 서 있었다. 소주 여섯 병을 품에 안은 딸과 그녀의 머리칼을 넘기는 엄마. 신호가 바뀌자 커피가 나왔고 그녀들의 뒤를 좇으며 텀블러 뚜껑을 꽉 닫고는 흔들었다. 우유와 커피가 잘 섞이도록.





조용한  , 소파에 기대 커피를  모금 들이켰다. 달달함을 느끼며  모금 .. 차가움을 삼키며 아이가 없는 50 동안 무얼 할까 고민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마른빨래가 쌓여 있고, 매트 위에 물건이 어질러져 있지만 말이다. 같은  초등학교를 입학한 동갑내기 친구 엄마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밀린 톡을 읽고 답을 쓰고. 30분이 훌쩍 지났다. 다이어리를 펼쳤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 말고 해야  일을 나열했다. 아침에 끝낼 , 아이가 없을  해야  , 틈새 시간을 활용해야  . 지금  순간에도 빨래를 개키면 되건만 다이어리를 썼다.





커피가 남았는데 아이 학원 마칠 시간이 되었다. 텀블러를 에코백에 넣고 학원으로 뛰어갔다. 오늘은 늦게 마쳤네. 늦지 않아 다행이다. 아이는 자신이 나오기 전에 엄마가 있기를 바란다. 누가누가 문구점에서 멋진 빗자루 사나 대결하자. 아이와 달리기 경주하며 문구점에 도착해 학교 준비물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친 아이가 게임을 하는 동안 집 정리를 했다.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자랑하는데 빨래를 접느라 못 봤다. 안 봤다.





저녁과 함께 남은 커피를 마셨다. 시원하다, 아직도. 당분간 소주 살 일은 없고 아이 음료수도 넉넉하다. 학용품 준비도 끝났고 한 달을 기다린 거실장도 도착했다. 텀블러에 커피를 비웠으니 다시 채우자. 2월에 다이어리를 비웠으니 3월부터 다시 채우자. 내일은 아이 아침을 먹여 학교를 보내고 집을 정리하자. 내일은 꼭 그렇게 해보자.








작가의 이전글 이거 하나로 집안 분위기가 바뀌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