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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Apr 14. 2023

나는 왜 사랑할 때마다 모욕을 당하지?

Ep.1 당신과 나의 소음 (2)

날 이해한다고 믿었던 그는 나와의 관계를 공인하지 않았다.


이렇게 성급하게 시작된 관계가 어떻게 끝났는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될 것 같다. 나는‘사귀자는 얘기는 안 했지만 곧 유학을 같이 가 줄 남자’가 불안해졌다. 채근하고 기다리고, 결국 불안에 가득 찬 채로 항의를 하면 연락이 곧바로 두절됐다. 극심한 회피형 애착의 소유자였다.


속이 타들어가던 나는 끝내 그를 소개해준 사람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연락이 뜨문뜨문 오던 그에게 카톡도 아닌 전화가 왔다. 그는 내게‘소개자한테 왜 자신의 안 좋은 면을 말했냐’며 고함을 질렀다.


항상 마음속에서 쇠를 갈아 칼을 만들고 있던 것처럼, 날 선 비수 같은 말을 기어코 내게 던졌다. 회사 마당에서 덜덜 떨면서 핸드폰을 부여잡았촉감은 잘 잊히지 않았다.


그건 모욕의 감각이었다. 순간 내 인생을 바꾼 중요한 질문이 나를 때렸다.


'나는 왜 사랑할 때마다 모욕을 당하지?'



3년을 사귄 친구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긴 시간 동안 무례한 말과 행동으로 소소하게 나를 무안하게 하거나 수치심을 주었다. 분명히 안쓰러워서 사귄 남자들이었는데 말이다.


곧장 심리상담가인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들여,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짱이라는 걸 20대를 막 끝낸 나는 알고 있었다. 이모는 동료상담사를 소개해줬고, 푸근한 아줌마 선생님은 왜 상담을 신청했는지 물었다.


“불쌍한 남자만 골라서 좋아하게 되는 게 싫어요"


정말 그랬다. 돌아보면 자신이 ‘시가 20억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다’며 재력을 뽐내는 남자도 있었고, 이른 나이에 승진을 빨리했다고 하던 남자도 있었다. 조건이 괜찮은 남자들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의 다 데이트 3회를 넘기질 못했다.


당시 난 주6일 동안 영화 보고 인터뷰하고 기사를 쓰던 영화 기자였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놀 땐 술 마시며 영화 얘기하는 게 다였던 '덕후'였다. 이런 주제에 누가 날 좋다고 하면 오호, 할 법도 한데 ‘어쭙잖게 돈이나 권력 같은 걸 들먹이다니’ 라며 오만을 떨었다.


엄마와 언니는 날 보며 '쟤를 진짜 어떻게 하냐’고 했다. 그쯤 되니 나는‘보통 여자’처럼 보이기 위한 보편적인 거절의 이유를 만들었다.


“못생겨서 싫어.”


외모 비하라니, 정치적 올바름을 포기한 만큼 효과는 제법 있었다. 내 연애사에 들어오는 터치는 훅 줄어들었고, 나는 마음껏 망조가 가득한 데이트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그 남자와의 이별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만큼 타격이 컸다. 자꾸 불쌍한 남자만 고르는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오이디푸스처럼 눈을 찌르고 싶었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은 연인으로 참 별로였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스스로 행복하지 않고, 그런 상태의 사람이 연인을 행복하게 해 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자기 마음이 천국이어야 넘의 마음도 천국으로 끌어가는 법이다.


그걸 머리로만 알았던 나는 첫 번째 상담에서 절박하게 읍소했다.


"선생님 저는 정말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 잘하고 행복하게 아기도 낳고 키우면서 살고 싶거든요. 저 계속 이러면 망하겠죠.. 엉엉"


상담 선생님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 약장수처럼, 유혹적이면서도 단호한 투로 말했다.


“노력하시면 팔자는 바뀔 거예요. 그런데 명심할 게 있어요. 어느 순간 센터에 나오기 싫을 만큼 힘든 시기가 옵니다. 그때 포기하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완주하셔야 합니다.”



그때 뜬금없게 그리스 신화의 음악 왕 오르페우스가 떠올랐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가 뱀에 물려 죽자,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 저승에 간다. 애절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저승의 왕 하데스 부부에게 10점 만점의 10점을 받고서 아내를 지상으로 데려가라는 허락을 받는다. 그때 하데스는 당부한다. 망자인 아내는 지상으로 가는 동안 오르페우스 뒤만 따라가야 한다고, 오르페우스는 절대 아내를 돌아보면 안 된다고.



<Noise of Life> Ep.1 당신과 나의 소음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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