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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Aug 31. 2015

장애 극복이란 말은 틀렸다

삶은, 각자의 능력 발휘의 장(場)

사회는 바쁘게 돌아가고 그에 따라 쏟아지는 소식들의 양은 엄청나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신문은 얼마나 많고. 또 TV 뉴스 매체는 얼마나 많은가? 그야말로 정보 홍수의 시대다. 물론 그 수많은 곳 중 저널리즘의 참 역할을 감당해 내는 곳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한다. 어쨌든 언론은 언제부터인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판을 벌였고, 그 싸움에서 이겨내기 위해 강하게 몸부림을 쳤다. 



날이 가면 갈수록 뉴스의 소식 하나하나는 한숨이 절로 나는 것들로 가득하고 때로는 이 모든 암울한 소식을 국민 모두가 듣고 용납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언론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세상이 흉흉해서 들려오는 소리일진대… 한편으론 그런 소식들을 매일 자신의 입술로 전해야 하는 기자와 앵커들 마음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듯 수용의 욕구와 관계없이 귀를 통해 전해지는 많은 정보들 가운데에는 ‘이슈’라는 단어와는 좀 동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가끔 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시는 노인 분들이나 장애인 분들의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같은 소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내게는 썩 달갑지만은 않다. 특히나 장애인들의 뉴스를 전할 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도드라진다. 



첫째는 ‘성공’ 타이틀이 없으면 슬픈 분위기로 방향을 잡아 보도한다. 이 경우는 백그라운드 뮤직(BGM)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시크릿 가든의 슬픈 곡들을 삽입한다거나 많은 가수들의 입으로 불렸던 ‘You Raise Me Up’ 같은 곡을 넣는다. 여담이지만 ‘You Raise Me Up’의 원곡 역시 시크릿 가든이 작곡했다. 



둘째는 ‘성공’이란 타이틀이 있을 경우, 극복이란 화두를 꺼낸다는 점이다. 현재 글에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보고자 한다. 먼저 전자의 경우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들을 자칫 불행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할 수 있다는 면이 우려스럽다. 사실 장애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경중의 차이만 존재할 뿐 대부분 힘든 삶을 사는 것이 맞다. 어찌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며 사는 분들도 상당수 된다. 그러면 그분들의 활기차고 강직한 행보를 촬영해서 뉴스로 내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장애의 영역은 일반적으로 비장애인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대중은 보이는 게 다라고 여길 수도 있고, 한 번 각인된 그 믿음은 쉬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어디인가 모자란 사람’으로 여겨지는 걸 감안하면 보도에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야기할 또 다른 문제는 비단 뉴스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 흐름’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성공한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성공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지만 흔히 성공한 장애인이라고 하면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예를 들면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인 이지선 씨나 ‘행복 전도사’ 닉 부이치치 씨. ‘세계적 석학’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분들이 성공한 장애인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옳을 듯싶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갖게 되는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공의 기준이 어디에 있나 하는 점이다. 성공이란 어차피 자기만족 아닌가? 아무리 대외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부와 명예가 그들을 감싸도 자신의 인생 가운데 만족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이 과연 진짜 성공일까? 



또한 지금 언급한 그분들이 정말 장애를 극복했을까? 물론 그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멋지고 강인한 분들임에 틀림없다. 트로피를 몇 백 개 제작해서 드려도 모자라다. 허나, 난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분들은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 진심이다. 다만 그들은 장애를 잊고 사는 것이다. 극복이란 말은 그야말로 병이 다 나아야 성립되는 말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여전히 자신의 어려움과 매일 싸워나가고 있다. 그들에게도 장애는 여전히 진행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위축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음은, 자신이 가진 장애에 집중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불가능을 잠시 잊은 채 순간에 열중하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끔가다 장애인의 일대기를 담은 수필을 접하게 될 때 안타까운 점을 발견한다. ‘무한 긍정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좋은 현상 같아 보이지만 본래 인생이란 기쁨(喜)과 즐거움(樂)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怒)와 애통(哀)이 어우러지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작가들의 의도가 살기 힘든 요즘 세상에 힘을 주고 힐링을 선사하는 것이 출판의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힘듦. 그 과정은 당연한 이치이거늘 그걸 제외하고 무분별하게 긍정만 지면에 싣는 것은 너무 부당하다. 



내 주장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달라 보이는 건 ‘취중 집필’의 이유가 아니고 어느 하나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부정과 긍정의 공존. 그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내 의견을 늘어놓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누군가는 아마도 소위 ‘성공을 거둔 자’와 자신을 비교하며 실의에 빠져 살 수도 있기에……. 



나는 왜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지? 잘 알려진 그 누군가처럼?…….”



처지가 비슷하다 하여 특정인의 삶을 곧이곧대로 따라서 살 필요는 없다. 누구나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삶 가운데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 무엇을 꿈꾸든 그것은 누가 대신할 수도 없는 당신만의 능력 발휘 장(場)인 셈이다. 그릇된 가치에 속지 말자.



커버와 본문 이미지로 삽입된 이미지는 “gratisography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 이미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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