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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May 18. 2016

숨, 말, 행동, 존재 그리고 결혼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논란... 숨겨진 의도 무엇인지 지켜봐야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사는 것’은 그야말로 모두의 숙원이겠죠.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파하자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분명히 승부에서만큼은 경쟁이 아름다운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누군가 이상한 차별을 받고,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잡아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Courtesy of Pixabay



장애인은 대표적으로 평등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저는 솔직히 모든 존재에게 평등이란 말의 의 미를 동일하게 들이미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상황에 따른 맞춤 빌드를 고안해 내야 한다고 믿지만, 혹 저의 그 생각이 틀렸다고 해도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 그 상태를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장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감 없이 말씀드려 장애인은 보통사람이며 아무 제약도 맞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숨을 쉬는데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며, 커뮤니케이션에도 그럴싸한 통번역사가 필요하고, 힘 있게 내딛는 발걸음에도 도움은 필요합니다. 장애의 경중이라는 것은 이런 식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빈도수정의되고 혹여 그 빈도수가 높아질 경우 슬프지만 당연하게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피대상이 되는 것자명한 사실니다. 



(흔히들 이해하신다고 하지만 진실로, 진실로 장애는… 이해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 기피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장애인은 피땀 흘립니다. 이름도 빛도 없는 그런 위치에서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은 삶의 희망을 이어가는 열쇠이며,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는 최소한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장애 유무에 관계없이 장성한 사람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을 해야 하고, 반쪽을 만나 살아야 하는 숙제가 있지요. 숨을 쉬고, 말을 하며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결혼. 즉,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만나 부부가 되고, 책임을 2배 아니 수십 배는 더 질 수 있을까? 보통의 사람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면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아니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해?! 까짓 거…’



물론, 수많은 보통의 존재들은 오늘도 결혼에 대해 고민을 하고 삽니다. 그만큼 커다란 숙제이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이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이런 오만을 단 한 순간도 떨 수 없습니다. 결혼에 골인해서도 문제지만 그 이전 과정이 더 큰 산입니다. 



“우리 딸(우리 아들)  쉬며 살게 해 줄 수 있겠나?” 

“우리 딸(우리 아들)이 어디 가서도 자네 때문에 떳떳하게 행동하도록 할 수 있는가?”  

“우리 딸(우리 아들)이 누구에게도 할 때 꿇리지 않게 해 줄 자신이 있나. 자네?” 

“우리 딸(우리 아들), 행복하게 해 주게.”



장애인이 고려해왔던 상황들을 내 사랑에게는 생각조차 할 여지도 주지 않아야 장인 장모와 시댁 어른들께 인정을 받습니다. 결혼은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만나 완벽을 추구하며 그 모토를 지향하는 데 있지요. 그게 결혼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다 준비된, 그러니까 이미 완벽한 상태에서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야 적어도 부모 입장에서 내 아들딸을 남에게 주는데 덜 아플 테니까요. 


허면 장애인은 그런 면에서 100점일까요? 아니면 제로 점일까요? 



그 답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군요. 적어도 100점짜리 며느리, 100점짜리 사위는 당장 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장애인 비하 발언이 나왔다는 이야기 때문인데요. 극 중에서 어머니 역할로 나오시는 고두심 씨의 대사가 결혼 기피 대상으로 장애인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비하가 됐다는 점을 많은 분들이 꼬집어 비판하고 계십니다. 



사실 저는 이 드라마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의 이 이슈 때문이라도 꼭 시청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여러 번 저의 다른 글로도 고백드리건대 굳이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출연시켜 많은 분들의 공분을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점입니다. 심지어 몇몇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장애인 역(役)의 출연이나 대사 언급이 필요 없는 경우도 봤습니다. 



여하튼, 많은 분들이 불쾌하신 것은 알겠고, 장애 당사자인 저로서도 참 아쉬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극의 초반이기도 하고, 앞으로 극을 이끄는 과정에서 장애나 장애인 언급이 전혀 안 될 수도 있는 부분이라서 일희일비하는 태도는 조금 아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비하의 여부는 향후 차회(次回)를 만나보면 될 일 아닐까요? 



무조건적 희망이나 낭만, 무조건적 동정을 야기하는 미디어의 애티튜드보단 나아 보입니다. 객관적으로 내 자식이 힘들 것 같아 반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리얼리티적 측면에서도 긍정적이고요. 



물론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쉬운 건… 말해봐야 입 아프지만요.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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