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진심을 앞에 두고 어떻게 재단할 수 있을까?
사랑을 두고 여러 정의를 내린다. 타이밍이라느니 한 방 큰 걸 노려야 한다느니 갖가지 말들이 오간다. 그들의 말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빽빽한 논문을 읽고 있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남녀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무슨 게임 공략을 해야 할 것 같이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 ‘낮이밤저’ ‘낮저밤이’ 같은 신조어도 나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연애란 무엇인가? 연애와 사랑을 동일선상에서 놓았을 때 감정의 화학작용이란 면은 동의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화학작용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슴이 뛰고 설레서 잠이 오지 않는 걸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사랑의 전부가 스킨십과 섹스로 정의된 것 같아 안타깝다.
사랑의 형태를 몇십 가지로 임의로 나누고 거기에 사람을 끼워 맞추고는, 같은 유형의 사람끼리나 혹은 반대의 사람끼리 만나 사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물론 이 같은 테스트들이 나를 돌아보는 데는 유익하다. 허나 사람의 독창성을 오랜 연구의 결과로 규정짓는 것이 싫다.
이전엔 혈액형으로 사람을 따졌었다. A형은 소심하고, O형은 활발하지만 눈치가 없고 AB형은 바보 아니면 천재라는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들. 이제 사람들은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우매하다는 걸 잘 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는 것도 서로를 공략해야 한다는 것도 낮이밤저, 낮저밤이 같은 19금(禁)의 열정도 다 좋다.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은 공부하다 막히면 자습서를 들춰 깨닫게 되는 답안 같은 건 없다.
사랑은 그 자체, 어느 것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어서 각자에게 다가오는 형태도 전부 다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하지 말라는 어줍은 충고는, 듣는 이로 하여금 사랑을 제한시킴과 동시에 자신 또한 사랑을 모른다고 인증하는 셈이다.
한없이 자유로운 것…, 그래서 무한대로 뻗어갈 수 있는 사랑은 해 봐야만 안다. 상대가 미치도록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주고 싶고, 주고 있으면 더 못 줘서 아쉬운…, 그 뻐근함. 사실 그 뻐근함조차 섣불리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진심을 앞에 두고 어떻게 재단할 수 있을까?
글이 한없이 너저분해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기분 탓이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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