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VEOFTEARS Sep 15. 2016

인간의 존엄과 죽음 사이

어떤 것이 진짜 존엄인가

우리는 늘 생명의 위대함에 놀라곤 합니다. 자연 앞에 사람은 작은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한반도는 지진의 안전지대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그 예측은 벗어났고, 그렇게 틀려버린 예측에 배반감을 느끼기도 전에 모두는 두려움에 떨었으며 아비규환의 현실을 겪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굳이 멀리서 찾지 않고 당장 며칠 전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신께서는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신께서 사랑하셨으므로 그런 능력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마냥 나약한 존재는 아닌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대단한 이유… 생각이 가능하다는 것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일 겁니다. 신의 손에 의해서 실수 없이 창조된 인간은 그러므로 존중받을 권리가 마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숨결은 고귀한 것입니다. 세상 누구라도 다 동일하며, 지위의 고저와 재물의 빈부, 외모의 잘남과 못남의 관계없이 어느 하나 버릴 생명이 없습니다.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다 다스려도 되지만 멋대로 해선 안 되는 것들 중에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소중함 때문도 있겠지만 신의 손에 지음 바 된 사람의 생사는 바로 신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은 지금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이야기해도 모자라겠지만 존엄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권리를 운운한다면 참 안타까운 일일 것 같습니다.



난치성 척추질환을 앓고 있는 벨기에의 마리케 베르보트 씨는 휠체어 스프린트 국가대표로서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번 리우 패럴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뒤 안락사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참 슬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일 상상도 못 할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힌 인터뷰에서 절절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왜!’라는 탄식이 먼저 나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저 또한 장애인으로서 신체의 아픔을 못 느낀다면 거짓입니다. 때문에 그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게다가 마리케와는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선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나이에 생을 포기하겠다는 결정 또한 결코 쉽진 않겠습니다마는 그래도 그 결심으로 더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생은 한 번이고, 그 삶에서 그대에게 비치는 빛이 단 한 줄기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



저의 글, 이 논지에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실 줄 압니다. 다소 종교적이고 격앙된 어조인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꼭 한 번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또 다른 영혼들에게… 혼신에 힘을 다해 노력하는 영혼들에겐 어떤 마음일지를 말입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존엄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그의 이름은 ‘가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