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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Sep 04. 2017

언어는 왜 배우는가?

주객전도

출처 = 유튜브, 유저 = May J



몇 년 전,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영상이다. 기저귀만 찬 천진난만 아이들이 정답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은 그야말로 웃음 짓게 만든다. 누군가는 다정한 아이들이 귀여웠는지 자막까지 입혔다. 



그런데 둘의 심오한 대화는 ‘다다다다다’하는 소리가 전부. 일 음절의 소리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영상 속 아이들은 충분히 교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몇 번의 박수와 웃음소리가 동반된다는 것. 



어른의 시각으로는 그저 옹알이에 불과하고, 뭐라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의 반복일 뿐일 테지만, 순수의 결정체인 아이들에게 반응이 나온 만큼 분명 소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이렇게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고 익힌다. 혹자는 절대적 생존 수단이라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소통 없이는 하루도 살기 힘들 테니 그 말도 틀리지 않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국내에 거주하기만을 원하지 않으며 더 넓은 세상과 인맥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그럼으로써 다가오는 언어의 장벽은 참 답답하기만 하다. 



성경에 기록된바 언어는 결국 인간이 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걸 넘어 동등해지고자 했기에 흩어졌다는데, 오늘날 언어 습득의 어려움 배움의 과정이 녹록지 않음을 떠올리면 그때의 거만한 생각을 지녔던 이들이 한없이 미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왕 일은 벌어진 지 오래, 게다가 세계화다 글로벌이다 떠들어댄지도 오래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배우는 수밖에.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생각해 본다. 



언어 습득의 목적 그 본질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소통에 있다. 물론 그 소통이란 범주가 늘 가볍거나 시시한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전문적이거나 때로는 촌각을 다투는 일에 놓일 때 절실함으로 언어 구사를 해야 할 때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영어(혹은 다른 국가의 언어일지라도)에 지나치게 얽매여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거나 정확한 무언가를 요구해 조금이라도 틀리면 실패로 직결되는 그런 상황을 자주 가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든 바탕은 아주 오래전부터이지만 좀 더 구체화하게 된 건 바로 어제다. 1인 미디어, 즉 개인방송의 홍수 속에 사는 요즘, 나 또한 쉽게 접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지인 동생의 방송을 보면서 망중한을 즐겼다. 



다국적의 사람들이 오가는 터라 나 역시 짧은 실력으로 영어를 구사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사람이 눈에 들었는데 그는 자신을 호주인이라고 소개하며 자국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리려는 듯 칭찬일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캐릭터가 특이했지만 투철한 애국자려니 하고 넘기고는 그의 말 대잔치를 대수롭잖게 받아줬다. 




짐작이었는지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내게 한국인이냐고 묻더라. 그렇다고 이야기하고는 방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필시 내 짧은 영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많은 대화가 오가고 나서 그 호주인이 한국어 공부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 이런 질문을 해버렸다. 




“저기 말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 내 영어 구사력이 10점 만점에 얼마 정도일까?”



그랬더니 저 멀리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침묵하던 미국인 왈,



“당신 이해력은 뛰어나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한데 정작 말을 잘 못해. 몇몇 구석이 틀려. 내 생각엔 6점.” (참 야박시럽다. 네가 한국말 해 봐 인마.)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호주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내게 당장이라도 우리 동네에서 살 수 있느냐고 물으면 예라고 답할 것이다.”

“당신이 내게,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려우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다 이해할 수 있다.”

“2개 국어 이상 하는 사람이 네이티브가 되는 것은 어렵다. 인구의 20% 정도? 혹 미만이려나?”

“당신의 그 시도, 자신감은 좋다. 언어 구사하는 데는 자신감이 우선이다.”



철저히 주관적인 의견일 거고 독려 차원에서 그랬단 생각도 하지만 고마운 맘에 당신 말을 믿고, 자신감을 갖겠다고 말했다. 물론 이후 대화에서 내 문장에 대해 그 호주인이 한 번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농담도 하고 즐겁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헤어질 즈음에는 나를 가리켜 “한국의 아버지”라고 하더라. 나이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언어는 완벽 구사할 수 있으면 좋은 건 틀림없고, 끊임없이 완벽을 위해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좋은 태도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언어 습득의 목적을 소통과 관계의 확대가 아닌 입시와 취업 그리고 성공이라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토익, 토플, 테솔, 그것도 모자라 좋은 발음을 위해 혀를 일부 절단하기까지. 주객전도의 늪에 빠져 있다. 길거리 지나다니는 외국인이 하는 ‘안녕하세요.’, ‘킴치’, ‘미쿡’이란 한 마디에 잘 한다 북돋으면서 정작 우리의 외국어 걸음마에는 왜 이다지도 관대치 못하는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못한다고 쫄지 말고, 어울리지 않게 영어 울렁증이란 거 주머니에서 꺼내 집어던져 버리고, 조금 틀려도 다 이해하는 이 있으니 자신감 있게 도전해 보자. 



우리 모두는 다다다다다로 절친되어버리는 아이보다 잘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영상 출처 = 유튜브

유저 = May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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