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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Sep 16. 2017

교회 교역자님들과 직분자님들께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PTL Time 9

0.



안녕하십니까. Love.of.Tears.라는 닉네임을 쓰는 하나님을 믿는 청년입니다. 우선 이 글을 드리려 결심하기까지 꽤 많은 고민이 있었음을 알립니다. 고민을 거듭하면서, 한때는 제 생각을 완전히 소각시켜버릴까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고민의 시간 가운데에도 사라지지 않아 결국 글로 남기고자 합니다. 그러니 비록 부족한 말이라 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



저는 30대 중턱을 넘어 결혼과 육아에 올인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가운데 서 있습니다. 헬조선, n포와 같은 신조어에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그마저도 어린 생각 같아서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은 채 앞만 보며 달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꿈과 희망 같은 단어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 탈 없이 매일을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셈입니다.



2.



그러나 이런 중압감과는 별개로 제게는 또 하나의 굴레가 있습니다. 그 굴레는 다름 아니라 장애라는 굴레입니다. 네, 저는 뇌성마비 1급의 장애로 인생 전체를 살아온 장애인 청년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장애라는 굴레는 대한민국에선 엄청 큰 요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풍문으로 전해 듣거나 또는 머릿속으로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듭니다.






3.



예수님께서 계실 때 수많은 병자의 치유가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 치유 속에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이 있었죠. 분명 그랬을 것이라 믿습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치료자가 예수님이셨기 때문이죠. 해서 바라는 것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타임머신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곳으로 가서 부르짖어 나음을 얻고 싶습니다. 전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목청 하나는 타고났기 때문에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저를 만나 주실 거거든요.



4.



주님을 뵙는 과정을 이렇게 허무하게 그려낼 정도로 제겐 장애 없는 몸으로 사는 것이 평생소원입니다. 수많은 무시와 조롱, 낯선 이방인을 볼 때의 시선뿐 아니라 언어(言語)와 사고(思考)는 자유로운데 신체의 부자유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부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짜증 나고 답답합니다.



5.



물론 그 어려움을 저만 겪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인구가 5,000만 정도라고 하죠. 그 가운데 10분의 1은 장애인 인구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사 가운데 밝혀진 것일 뿐, 누락된 인구까지 따지면 1,000만 정도의 인구가 신체 혹은 정신의 아픔을 겪고 삽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아주 미세하지만 이전보다는 차별하지 말자는 움직임이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람이 일고 난 후부터 즈음인 것 같은데… 장애를 이겨낸 사람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 TV, 소셜 미디어, 신문, 도서 등으로 몇몇 분들의 스토리가 전파되면서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6.



하지만 문제는 있습니다. 그분들께서 주목받고 변화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좋은데, 언젠가부터 장애와 연관되어서는 ‘극복’의 프레임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이지선 씨나 닉, 송명희 씨 같은 분께 장애를 극복했다고 하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이죠. 제 생각엔 장애는 아무리 싫어도 함께 가야 하는 애증의 존재 아닐까 하는데요. 자꾸 극복이란 단어가 떠오르니 당황스럽습니다.



물론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그분들이야 말로 주님 안에서 아주 훌륭한 롤모델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마는 그분들이 현재 장애와 안녕하셨습니까? 아니죠. 상황은 틀려진 게 없지만 잘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극복이란 말보다는 ‘벗 삼아 살고 있다.’ ‘함께한다.’ 정도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극복이란 건 병마가 떠나갔을 때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저의 기우일지는 몰라도 극복이란 말을 자주 내보내면 자칫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



7.



이런 프레임이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시는데도 예화로 사용되는 점은 아쉽습니다. 저는 어느 분을 만나든 칭찬의 의미로 극복했단 말을 들으면,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전 극복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낮아진 자가 되어서 주님을 만나게 됐기에 감사하지만 솔직히 저는 아직도 장애 때문에 힘들고, 또 할 수만 있다면 벗어버리고 싶거든요. 이런 마음밭인 사람이 감히 그런 말을 들으면 면구스럽기 때문입니다.



8.



하나 부탁드리는 것은, 주님의 일하심을 말씀하시면서 장애인을 예로 드는 것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세상사 모두가 주님의 실수 없는 일하심, 행하심이지만 막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 있는 당사자가 듣게 되면, 혹 하나님을 시기하거나 증오하고, 오해할까 우려됩니다.  



9.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구원을 얻었고, 천국행 티켓을 딴 행운의 큰 사람, 이미 큰 사람이지만 이왕이면 세상에서도 큰 사람이 돼서 예화로 들어도 부족함 없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전 중증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라든가 혹은 성공한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 게 아니라 주님을 잘 믿는 자, 주님께서 인정한 자로 남을 수 있다면. 더불어 타인의 기(氣)를 꺾는 자가 아닌 타인에게 힘이 되는 자… 공급원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10.



언젠가 다른 글을 통해서도 쓰겠지만, 제 인생은 꼭 하루살이 인생 같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하루 즉 내일을 또 걱정하거든요. 뭐. 모두가 그렇다고 위로하기엔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은 영혼인데, 확실한 건 그때마다 주님께서 피할 길을 내십니다. 주님 안에 있다면 죽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사는 법만 있습니다. 우리가 늘 걱정의 길을 건널 때라도 주님은 삶의 교통경찰이십니다.



작가의 말
비교 없는 세상에서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개개인을 비교하지 않으시니까요.  



커버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본문 이미지는 “Pixabay”“Unsplash”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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