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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Oct 02. 2017

‘아멘’과 ‘노멘’의 경계에서

PTL TIME 10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교회 교역자님들과 직분자님들께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를 먼저 읽으시길 권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독자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삶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뭔 놈의 문젯거리가 이리도 많은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기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오죽하면 저의 인생을 두고 하루살이 인생이라 표현했을까요?



이전 글에도 이 표현을 썼던 기억이 나는데 그건 저의 삶이 무의미하다거나 남루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 평탄하지 않은 삶 덕에 매일매일 걱정의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걱정의 열매를 눈으로 볼 수 있고, 값을 치러 팔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재벌이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랄 것도 없이 주렁주렁 열리는 열매를 과연 누가 살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이처럼 처치곤란인 열매 더미에 깔려 허우적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숨을 쉬고 삽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하나님. 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덕이겠죠. 이건 장담하건대 진리입니다. 왜냐면 경험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문제 문제들 마다 피할 길을 내십니다. 그러므로 숨길을 트이게 하사 다시 내일을 살게 하시죠. 아멘.



돌이켜 보면 수없는 ‘아멘’의 시간을 마주했습니다. 그때마다 감격스러워서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은 적도 있고, 눈을 감고 침묵의 기도드린 적도 있고, 또한 눈물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



자. 이쯤 되면 저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저 하늘 보좌와 맞먹는 위치에 있을 것 같고, 더불어 논스톱 감사의 퍼레이드가 펼쳐질 것 같으신가요?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우리’란 표현을 썼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이야기입니다.



자, 제가 늘 기쁘고 감사해서 늘 ‘아멘’의 삶 살 것 같으세요?



아뇨. 저는 사실 ‘아멘’과 ‘노멘’의 경계에서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가끔 거짓말을 하며 살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거짓을 말할 수 없어서 진실을 고합니다. 십중 육칠은 아마 노멘일 것 같군요.



우선 저의 존재가 천하보다 귀하다는데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제 기준에선 아니거든요. 귀한 건 늘 삐까뻔쩍하고 쓰기에도 아까워서 모셔두잖아요.



성경에는 금은 그릇보다 질그릇이 귀하다고 말씀하니 그럼 제가 금은 그릇의 레벨은 못 되더라도 질그릇. 이왕이면 그냥 질그릇 말고 보통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편하게 쓰는 ‘편한 질그릇’이 됐으면 좋겠는데 재질만 질그릇이고, 모셔만 두니 쓸 데가 없네요.



살아온 해로는 어디 명함도 못 내밀지만 개월 수나 일수로 따지면 꽤나 되는데 거기에다 하루 쉬는 숨이 14만 번쯤 되니 이러면 정말 많이 살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저를 향한 일하심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게다가 저는 지상 최대의 심부름꾼입니다. 하는 거라곤 손가락 몇 개 움직이는 거. 그리고 말하는 거, 생각하는 거. 신체적으로 ‘스스로 한다.’고 할 수 있는 건 이거 빼고 추가로 몇 개 더? 아무튼 이 정도인데 저를 탓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합법적 심부름꾼이지요.



한데 문제는 심부름을 하는 그들이 많이 힘들어요. 해서 불법이 아님에도 죄스럽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게 제 일이라고 하세요. 제 입장에선 그야말로 노멘입니다. 그럴 수 밖에요.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죠. 저는 올해로 20년째 출석하는 아주 정든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주일을 지켰어요. 그곳에서 만난 보디가드 같은, 아니 그보다 천사 같은 형제자매들이 계시는데 특히 탑 2에 빛나는 형제들은 소위 의형제라 해도 모자라지 않아요. 늘 그랬듯 오늘도 그분들과 교회에 당도했는데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웬걸. 저 오기 전에는 멀쩡하던 승강기가 멈췄답니다. 이런 젠장.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도 모르게 뱉어지고 말았으니. 본당은 3층이고, 가려면 저를 안거나 업거나 해야 하는데 설상가상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보다 아랫 연배의 천사 2 형제 왈, “제가 안아서 모실게요.”




천사 2 형제가 날 안고 계단을 올랐을 때 취했던 가장 비슷한 자세



그리고 저보다 윗 연배의 천사 1 형제님은 휠체어를 들고 오르셨죠. 그런데 그 계단이 왜 이리도 길든 지, 천국의 계단인 줄 알았습니다. 한 삼십 킬로미터의 거리는 되는 줄 알았습니다.



후배 천사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선배 천사께도 유구무언… 무사히 올라오고 나서 할렐루야를 외쳐야 했지만 도리어 이런 말이 튀어나갈 뻔했습니다.



“주님, 제가 이래요. 그래도 제가 잘났어요? 아니, 잘 하고 있어요?…‥ 노멘.”



주님은 신비로운 해결사십니다. 신비로움의 경지를 깨닫지 못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직접 보여주셔야 아멘이 나오지 무지한 자의 한계로는 노멘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운동 한 번 잘했다.’는 천사들의 합창으로는 도무지 위로가 안됐어요.



다만 오랜만에 동생을 안아본 건 만족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만족, 동의하지 못하는 노멘의 상황은 비단 이뿐만은 아닙니다. 하루 14만 번의 호흡 중 10만 번은 될 겁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나의 의지, 상황, 생각 등이 관철되지 않고 작아집니다. 결국 아멘 하게 됩니다. 10만 번의 노멘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당시엔 안 그래도 지나고 나면 다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수없는 아멘과 노멘의 온도차를 경험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안 봐도 비디오여서요.



그런 의미에서 전 여전히 부끄러운 크리스천입니다.



그래도 전 염치 생략하고, 끝까지 의지하려고요.



이유는 ‘그분 밖에 없어서요. 의지할 데가…‥.’



커버와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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