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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Sep 23. 2017

나를 인정한다는 것

내가 해냈다면,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 역시도 다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나를 인정한다 (1)



시작부터 부끄러운 고백 하나



“난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다행인지 반성해야 할 일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은 내 글을 처음 마주하면 굉장한 다독가인 줄 생각하신다는 것. 그때마다 겸언쩍어서 “예.”라고 답한 뒤 말 끝을 흐리거나, 때로는 회개라도 하듯 낱낱이 사실을 고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반응들이 가끔은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것이 4년 전에는 모 인터넷 신문 사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했고, 칼럼니스트 직을 놓았을 때도 꾸준한 기고를 했으며 다른 곳에라도 이런저런 주제로 글을 썼으니까. 더불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공간, ‘브런치’에는 가능하다면 매일 쓰기로 작정이 되어 있으니 보는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다. (이번이 300번째!!)



나는 흰 종이와 펜이 주어지면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한데 무슨 할 말이 맨날 있느냐면서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 추켜세워주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그 칭찬의 의미는 짐작건대 집필 스킬이 아니라 다작(多作)에 의한 것이리라.)



어쨌든 맨 처음 큰 따옴표까지 붙여가며 고백한 이유는 부족한 나를 치켜세워 준 이들에게, 다독(多讀)할 것이라는 믿음을 깬 죄를 사죄하고 싶어서다.



물론 내가 책을 잘 읽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책 속에 기록된 내용은 하나 같이 신비하고, 경이로워서 낯선 곳을 탐험하는 주인공이 된 느낌을 선사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나의 창작에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 / 칼럼니스트 같은 직함을 가진 이들은 으레 책을 사랑하는 것이 덕목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아직까지는 대중 앞에 내 이름 석 자가 알려지기엔 시기상조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시 창작에 방해가 된다는 이야기로 돌아오자. 정말 그렇다. 책 속에는 명문들이 많다. 작가로서 신세계이고 더 나아가서 인용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때때로의 인용은 작가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칫하면 내 색깔이 없는 글이 될 수도 있다. 당장 남의 것을 베끼거나 인용하는 것보다 내 방식을 확립하고 나만의 표현을 해보는 연습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끼워 맞추기일지는 몰라도 국내 3대 락 기타리스트인 밴드 부활의 김태원 씨 또한 다른 이의 곡을 많이 듣기보다 그때그때의 상황이 주는 영감을 가지고 곡을 쓴다고 하니 나름의 위안을 얻는다.



자,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걸 보니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었나 보다.





나를 인정한다 (2)



아주 어릴 때는 엄마가 책을 읽어주셨고, 조금 자라서는 동화책을 찾아서 봤다. 그리고 학창 시절부터 한 20대 후반까지는 책을 많이 넘기다 보면 책이 쓰러져서 보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고, 책이 넘어가면 넘어가는 대로 자존심 팍팍 세우며, 몇 시간을 걸려 완독 했다. 그러나 30대가 되고 나서부터는 책 한 번 붙들면, 완독해야 하는 내 지랄 같은 성격 탓에 (사실 이것이 책을 자주 보지 않는 결정적 이유이다.) 자존심 다 버리고 누구에게든 “이거 쓰러지지 않게 꼭꼭 눌러 주세요.”라고 반드시 말하게 됐다. 예전에는 그 한마디 하기가 왜 그리도 힘들었는지. 아마 무시당하기 싫었나 보다.



혹자는 책 위에 작은 책자를 올려놓거나 아니면 긴 막대를 놓는 식으로 설루션을 제공하곤 하는데 솔직히 이런 방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페이지 읽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넘기고 고정하는 그 시간이 읽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린다.



남자는 됐고(흐흐흐) 책 읽어 주는 여자 혹은 책 넘겨주는 여자가 필요한데 강제로 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 짜증 나고 열불 터져도 내가 넘기는 수밖에. 그래서 요즘은 e북! 전자책이 필요하다 느낀다. 사실 예전 같으면 책의 로망은 종이책이지. 이러면서 완강히 고집을 세웠을 텐데 지금은 아니다. 그저 편하면 장땡이오. 한데 문제는 e북의 대중성도 그렇거니와 폰 화면은 정말 작아 읽기 힘들고, 아직까지 PC는 액티브 엑스를 이용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하니 천상 향후 몇 년 간은 아날로그 식으로 이 꽉 깨물고 종이 책 읽어야 할 것 같다.





나를 인정한다 (3)… 이라기 보단 부탁(?)



누군가는 “마흔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엄마 이야기를 왜 이리도 자주 하냐.”라고 하겠지만 사실 엄마는 내겐 하늘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이랄까. (아! 아버지께서도 물론…‥.) 내가 무슨 만날 사람이 없고, 경험할 것이 없어서겠는가. 누구라도 만나려면 만날 수 있고 또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다. TV가 없는 것도 아니오. 인터넷이 없는 것도 아니오. 전화는 어디서든 빵빵 터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스승으로 삼는 것은 나의 대한 사랑이 내가 믿는 분, 즉 하늘 아버지와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가 자주 내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서 오는 너를 향한 좋지 않은 말들. 그러니까 케어해 주는 데 있어 발생할 수 있는 신체적 힘듦 때문에 무심코 내뱉는 나쁜 말들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넘기라.”는 말이다. 이미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알고 도리어 위로해줄 줄 아는 심령을 가졌으니 그저 관대하게 껄껄 웃으며 넘기라는 말씀인데 사실 이미 나는 진즉에 그런 것들을 하고 있고 대수롭잖게 넘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가족과 지인들이 내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을 유지시키는 데 있어 힘듦을 자주 호소한다면, 도움을 받는 자로서는 그 광경을 남의 일 보듯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몸은 힘들어도 정신은 온전하니 받는 도움의 손길에 미안하거나 감사해할 권리도 있는 것이다. 나를 돕는 많은 사람들이 내 시선 안이든 밖에서든 나로 인한 육체의 고통을 호소할 자격과 권리를 가졌듯 (그 과정에서 오는 서운함은 2차 문제이고) 나 역시 그들 모두를 향해서 미안과 감사를 말할 권리를 인정해줬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꿀잠 자다가 등이나 어깨가 아파 몸을 반대로 돌리는 것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내 엉덩이를 자주 보는 화장실 변기에서도, 밥을 먹는 식탁에서도 어려울 수 있고, 어디를 가고자 하는 데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함도… 이 모든 것 다 감내해야 하는 사람도 결국 나라는 것 알고, 인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 신체와 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소하거나 클 수도 있는 답답한 문제들을 놓고, 나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나 고집스러운 나란 인간도 결국은 인정해서 그 어려운 걸 또 해냅니다. 내가…‥하며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 대위 코스프레할 수 있다면,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 역시도 다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거울을 내 쪽으로 가져다가 서면, 거울 속엔 필시 어떤 여인이나 사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비친 그 / 그녀를 보고 처음엔 맘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외모가 아닌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반드시 맘에 드는 구석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
우리, 인정하는 연습합시다...          

         


커버와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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