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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May 18. 2018

여우는 슬펐다

받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배려는

어느 날, 약육강식의 본거지 야생의 한 복판에는 흡사 콜라병 같이 보이는 주둥이가 좁은 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동물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 둘 그 작은 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데 웬일인지 며칠이 흘러도 동물들의 병에 대한 애착은 식을 줄 몰랐다. 아무리 동물이라곤 하나 지능이 있어서 식상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무슨 이유인가 알아봤더니 그 병 안에는 동물들이 좋아할 만한 먹이가 있었던 것.



누가 넣어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참 용기 있고, 신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계속해서 같은 병에, 같은 음식이 언제나 그 자리에 담기다 보니 그곳은 동물들의 먹이 그라운드가 됐다.






그렇게 신기했던 풍경이 어느새 익숙함으로 변할 때쯤 기이한 상황을 또 목도하게 된다. 혀가 긴 개미핥기는 먹이를 먹는데 누워서 떡먹기일 정도로 쉬운 반면, 지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여우는 신체적 특성상 먹이를 손에 얻기 어려워했다. 물론 병을 옆으로 넘어뜨려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먹으면 되지만 여우는 고집을 세워가며 개미핥기가 풍요롭게 식사하던 자세로 일관했다. 한참을 병과 씨름하며 낑낑대던 여우는 사람이 보기에도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정확히 어디에서 들은 지는 가물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이 스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좋은 것을 나누려는 선한 의도가 있어도 각자에게 용이한 방식이 아니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해서 의도가 우선시되기보다 어떤 방법으로 실천할 수 있느냐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묵직함이 배인 결론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필자는 2007년, 활동보조라는 단어가 참 생경할 때부터 서비스를 받아왔다. 당시에는 활동보조라는 말 보다 자원봉사 줄여서 ‘자봉’이란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던 때인데 자봉은 한시적이고 봉급 역시 없거나 혹은 아주 적은 금액만 받고 노동을 하는 것이라면 활동보조는 자봉의 확장 개념으로 장애인을 돕는데 전문성을 갖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취약계층인 장애인의 활동성과 자율 생활을 담보하고, 나아가 자립 생활에 이바지하기 위해 만든 서비스다.






필자는 2007년 당시 활동보조 등급(장애 등급과는 다름)에 따라 월 20시간에서 80시간까지 받을 수 있던 상황에서 3단계인 60시간을 배정받았다. 소통이 자유롭다는 이유였다. (80시간을 배정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는데도)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매해마다 사용 가능 시간이 늘어 현재는 월 128시간이 됐고, 그에 따른 보조인의 처우도 미비하지만 조금씩 나아졌다. 물론 미비하다는 표현만큼이나 현재 상황 역시 부족하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도 어지간히 험난(?)했다. 그 순간을 전부 기록하려면 아마 며칠을 할애해도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그 과정들은 생략하려 한다.


 

2007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필자와 만난 인원은 어림잡아 12명 정도다. 그러나 활동보조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대로 한 적은 세 번 정도뿐. 나머지는 갖가지 이유 때문에 2개월이나 3개월을 채우지 못한 이들이 다수이며, 심지어 하루도 못하고 떠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까 제대로 한 세 번이란 것도 세 사람이기 때문에 세 번이 아니라 세 번 중 두 번은 동일인물이고, 그 천사 같은 사람은 바로 ‘지인’이다. 



임금이 적은데 힘은 드니 해주는 입장에선 메리트가 없고, 이용자는 갑(甲)인 보조인의 눈치를 봐야 한다. 심지어 중증장애인들은 노동이 어려워 수입이 없는데 둘 간의 활동비용 지출의 책임은 원칙적으로 이용자에게 있다. 그밖에 애로사항들 역시 보조인과 이용자 모두에게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소통을 중요시하는 필자는 지나치리만치 그들과 오랜 시간 이야기하며 합을 맞췄다. 기간이 짧으면 짧은 대로 내내 소통하며 그들이 겪어야 할 문제들을 경청하면서 나름으로는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서비스를 이용하면 할수록 개인 성향의 편차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요인은 서비스 자체의 결함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도 마냥 정책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눈앞에 보이는 컴플레인을 묵과할 순 없기 때문에 솔직히 동생 혼내듯 혼낸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런데 실은 문제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젠 싸울 동생도 없을 만큼 남성인력이 전무하다. 현재 활동보조인 인구의 99% 이상이 중 노년 여성인구가 차지한다. 움직임에 대한 전반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중증의 장애인들은 대안이 없으니 여성 보조인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목욕이나 세면, 배변 같은 노동력이 필요한 업무에 대하여는 남성 보조인이 절실하다. 이런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남성 보조인의 인구 역시 메말랐으며 이제는 보조인 역시 성별과 무관하게 중증장애인을 기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가족 활동보조다. 같은 연령대라고 해도 그 전문성은 논할 가치가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바로 시행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반대 여론이 있다. 가족이 수입을 챙긴다. 가족이기에 서비스의 질을 보장받을 수 없다. 원래 목적인 자립생활을 도모한다는 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 등이다.



설상가상으로 활동보조인은 적절한 쉼을 보장받지 못한다면서 보조인의 쉴 권리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보조인들에게 휴게시간 제도를 의무화하고, 이는 오는 7월부터 바로 시행된다. 휴게시간 관련하여서는 아래의 기사 링크를 참조하시면 좋겠다. 필자가 기고 중이기도 한 장애인 인터넷 언론사 <에이블뉴스>의 기사다.



활동지원사 휴게시간, 가족 활동보조 허용



물론 도움 주시는 분들도 쉬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가족 활동보조를 허용할 경우 가족이 없는 분들에겐 대안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인력난을 겪는 지금 상황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에겐 가족 활동보조가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돈을 착복한다느니 서비스를 제대로 못 받느니 하는 문제는 양심적으로 하면 해결된다. 자립생활 가능성 저해 같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다. 당장이 아쉬운데 무슨… 실제로 필자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족 활동보조를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살아온 세월이 조금은 ‘현실적인 나’로 바꿔 놓았다.



최대한 자세히 하지만 이해 가기 쉽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어떠셨는지 모르겠다. 기고 활동하고 있는 타 매체가 아닌 이곳에 관련 글을 올리는 것은 60만 브런치 작가님들과, 수많은 독자분들께서 함께해주시길 바라서다.



개미핥기를 따라잡고 싶던 여우는 웬일인지 자신의 지능을 썩혔다. 물론 그건 여우의 잘못도 크다. 하지만 먹이를 줬던 익명의 그 사람에게도 잘못은 있다. 동물들의 생김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 배식이 그것이다. 장애인 복지도 마찬가지다. 장애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슬픈 여우의 상황을 우리 역시 겪게 될지 모른다.



“왜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느냐!”하는 토로가 아닌 “이런 사람도 있다.”는 외침이다.



복지는 행복하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니까 이런 외침쯤은 과하지 않다고 믿는다.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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