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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Jul 26. 2019

무모함을 즐기던 소년, 지금은?

오늘날의 무력감에 대하여

열여덟 후반… 그리고 열아홉의 시작.



세상에서는 꽃 같은 나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 그 시절.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상황은 많이 달랐으나 그렇다고 그 말을 아예 안 듣고 살았던 건 아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저 세상모르는 어린애 취급에다, 지금 지내는 시간들이 마냥 좋을 때라 치부당하던 그때가 정말 싫었다. 나는 다른 집 아들들처럼 몸이 성하지도 않고, 게다가 공부도 그닥이지만 그래도 깜냥 것 살아내느라 힘든데 좋을 때라니. 한데 한 가지 특이한 점 하나는 이런 말을 부모님께 들은 것보다 선생님이나 친척들한테 들은 기억이 더 많다.



그렇다. 우주에서 바라본 그때의 나라는 점하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좋을 때였던 것. 하지만 앞서 밝혔듯 그 말이 싫었던 이유는 삶이 힘들어서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사춘기의 절정은 슬픔보다 기쁨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매일이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감히 자신 있게 행복했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사춘기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먼저는 신앙 때문이었을 것이고, 둘째는 현명하신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이기도 했지만 두 가지 이유들과 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 요인은 바로 꿈이었다. 꿈이 있었기에 힘들어도 힘든지 모르고 살 수 있었다.





내 꿈은… 프로게이머

내 일생에서 꿈은, ‘뽀시래기 시절’에 꿈꿨던 운전기사 말고는 없을 줄 알았다. 그때 그 VOD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VOD는 다름 아니라 2001 한빛소프트 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 대회 영상이었다. 임요환 선수장진남 선수의 대결이었는데 임요환 선수가 플레이하던 테란은 내가 주로 플레이하기도 했지만, 당시엔 플레이하기 까다로울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두 종족에 비해 약해서 기피했었는데 그런 테란으로 압도적 경기력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반해버렸다.



아마도 게임이 스포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날부터 내 꿈은 프로게이머가 됐고, 1등은 될 수 없을지라도 임요환 선수와 같은 무대에서 붙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연습에 매진했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러니 그전까지 잔소리 제로에 가깝던 부모님 역시 여느 부모님들처럼 우려하시는 마음에 모진 말을 뱉으셨다.



처음 임요환 선수를 알게 됐을 때만 해도 e스포츠는 불안하기만 한 모래성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선풍적 인기에 힘입어 대형 기업들이 대회나 팀에 스폰서를 담당하며, 그에 따라 연습 환경도 좋아지고 처우도 좋아지면서 체계화될 즈음에 내 열정도 덩달아 솟아올랐다.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불편한 한 손을 원망하는 일 따윈 없었다. 「물론 스타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II를 지나 리그 오브 레전드나 배틀그라운드 같은 게임이 주류가 되고 대중의 인식이 많이 변화한 현재의 e스포츠 판 역시 야구나 축구, 농구처럼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화 됐다고는 못하겠다.」 



그래서일까. 2006년, 24살이던 해에 거짓말처럼 임요환 선수를 만났고, 그때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요환 선수. 출처 = 위키피디아



2010년, 요환이형이 스타크래프트 II로 전향하고, 나 역시 스타크래프트 II의 국내 매이저 대회인 GSL 예선에 문을 두드리기 위해 스타크래프트 때보다 더 열심히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에 가족들의 의사를 반하면서까진 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꿈을 접게 됐다. 대신 가슴속에는 늘 실재하므로 포기란 단어는 쓰지 않으려 한다. 아무튼 프로게이머를 꿈꾼 그 시절에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난 무모함을 즐겨.”



무모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6년에 요환이형을 만나고 좋은 인연이 되고 나서, 피겨퀸 김연아 선수와 만나기로 맘을 먹고, 행동에 들어갔다. 실제로 팬카페에 남긴 어떤 글이 호평을 얻어 팬카페의 배려로 1:1 만남이 성사될 뻔했으나 당시 연아 선수가 소속사가 바뀌는 중대한 사건이 있어 팬미팅이 취소되는 바람에 만남은 불발되었다.       



글쟁이의 시작

30대가 되고, 생각할 것도 많아졌다. 풍문으로 들었던 서른이 접어든 뒤에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전설 같은 소리가 결코 허튼 뻥이 아님을 알게 됐다. 순수하게 나만 바라보고 나만 위해서 살 순 없었다. 비단 꼰대들의 나잇값 운운 때문이 아니라 어른들의 리얼리티는 새로운 세계였다. 게임에 올인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놓는 시간이 장기화되고 그에 따라 빠른 대처를 위한 손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졌다. 가뜩이나 핸디캡은 존재하는데 손까지 둔해지니 (손이 굳는다고도 표현한다) 할 수 없었다. 게임만큼 좋아하면서도 그나마 잘하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언뜻 글이 떠올랐던 것. 그 시작이라 하면 영화 <타이타닉>이 나온 당시였고, 영화가 주는 임팩트가 실로 컸으므로 무언가 끼적이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였다.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그것이 작가 러브오브티어스의 시작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이후 ‘모든 이들의 흑역사 기록장’이라 불리는 싸이월드에 습작 삼아 올린 단편들이 일촌들의 호평을 얻었고, 자신감을 얻게 됐던 것.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글을 썼던 것은 2010년, 에이블뉴스라는 인터넷 장애인 신문에 기고 글을 게재하면서부터였다. 당시엔 (게임) 연습과 집필을 병행했지만, 점차 글을 쓰는 일에 재미를 붙여 더 집중하게 됐고, 그때부터 내 신념은 이렇게 바뀌었다.



펜으로 세상을 바꿔 보자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길로만 향한다. 운전기사는 애초 어려울 운명에, 무모함을 즐긴다는 오만함도 모자라 이젠 펜으로 세상을 바꾸자니… 지금 생각하니 물색없이 바다 위를 여기저기 튀어 오르는 애송이 개구리 같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나서부터는 나도 모르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던 것 같다. 물론 고백하건대 나 자신을 알리기 위함도 없지는 않다. 사명감뿐 아니라 본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모든 종류의 예술가들은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상업적 글을 쓰지도 않았다. 원래 그런 류의 글은 젬병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마침내 2015년 8월. 꼭 이맘때다. 브런치에 입성했고, 지금까지 길이에 상관없이 400여 개의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무력감?

서른 후반의 나이… 이뤄놓은 걸 이야기하라면 딱히 내밀 명함 같은 커리어는 없지만, 그래도 같은 일상, 하루 십사만 번의 호흡을 달콤하게 여기며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무력감이 찾아왔다. 아마 올봄부터인 것 같다. 비단 글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 전반에 해당한다. 딱히 계기도 없고, 시기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이 무력감의 굴레에 접어든 순간부터는 그저 뭘 해도 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팩트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들처럼 일을 해서 먹고사는 치열한 직장인의 모습을 띄지도, 지독한 구슬땀을 흘리는 노동자의 모습을 띄지도 않으니 특별히 보상을 준 적은 없었다. 이를 테면 휴가나 여행, 힐링 같은 것들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살아온 지난날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건 필요 없다고 느꼈나 보다. 나도 그런데 더군다나 먼발치서 내 인생을 바라본 타인들은 꽤나 널널해 보였으리라.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장애 있는 몸으로 사는 것, 게다가 장애가 벼슬이 될 수는 없기에 평범함마저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정체돼 있거나 도태되어선 안됐다. 늘 함께하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함과 동시에 세상을 향해 소통의 안테나를 뻗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내 옆 사람들이 힘들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가족들이나 지인들이나 저마다의 니즈는 다 다르고, 그걸 전부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사 안다고 해도 충족시켜줄 수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힘들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것도 힘들고, 반대로 내가 찾아가는 건 더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겨워할 때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덧없이 흘러만 가는 세월을 잡아채 주는 일은 택도 없는 일이다.



이 곳에 밝힐 수 없는 모든 상황들까지 고려할 때, 때로는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보은 하는 일임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깐에는 요령 피우는 일 없이 정성 다해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정의해야 할 것만 같은 요즘이다.




글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출판 신고 글에 기가 죽는다. 당사자분들께는 축하의 박수를 드린다. 하지만 나 같은 ‘글빨 유목민’ 같은 사람들은 솔직히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필력 탓이긴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쓰는 글이 빛을 못 보고, 통계 그래프가 지면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면, 근래 같으면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쨌든, 이런 마음이 도통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무기력함은 잘못됐다고 손가락질당하거나 비난받아선 안 된다.



시간에게 쉼이란 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경로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멈춰보는 것 또한 인생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코 쉼은 퇴보나 나태가 아니며, 만물 모든 것이 수명을 다 하면 시들거나 멈췄다가 다시 일어나듯 오늘 나의 이 시간도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한 찰나의 움츠림이라 여기려고 한다.    

 

 

쓸데없이 길어지긴 했지만 근래의 개인적 소회를 남기고자 함이 컸다. 물론 솔직한 심정을 담아내야 해서 올리기까지 많이 망설이기도 했지만 며칠째 머릿속에 맴돌았기에 용기를 내어 적어본다. 지금, 나와 같이 무기력감을 겪고 계시는 모든 분들이 힘내셨으면 좋겠다.



1.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2. 본문 이미지는 “Wikipedia”에서 인용하였으며 구글에서 “수정 후 재사용 가능” 필터링을 거쳤음을 밝힙니다.   

3. 본문 이미지는 “Unsplash”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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