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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Apr 20. 2020

고독한 항해

행복의 조각들이 나로부터 시작되어 흩날리기를…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OST Part.1인 김윤아 씨의 <고독한 항해>를 유튜브를 통해 듣고 있다가 흠뻑 빠져 들었다. 시적인 가사에 처절한 보이스, 그리고 뻥 뚫리는 울림까지 한 곳에 다 담겼다. 아마 솔리스트 김윤아의 매력이 바로 이것 아닐까 싶다. 그녀의 노래에는 마치 독창적인 세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한동안 멍 때리게 된다.



‘고독한 항해’… 이 노래의 제목이자, 전하고픈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할 법한 이 말을 새겨보니 문득,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포레스트와 댄 중위가 새우잡이 배를 몰고 바다로 향했을 때 조우한 폭풍우 장면이었다.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댄 중위는 겁을 먹고 허둥지둥 대기는커녕, 자신이 꼭 세상의 대장인 듯, 닻 중간 즈음까지 올라서는, 신에게 한 번 붙어보자며 결투 신청을 한다. 그의 음성은 곧 그의 광기와 맞닿았고, 그 울림은 가히 커서 여태까지 가슴에 남아있다. 이렇게 영화를 마주한 뒤부터는, 항해라는 말만 들으면 앞서 말한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항해였고, 나라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잃은 두 다리는 필시 그로 하여금 많은 절망과 시련을 주었을 것이다.



4월 20일인 오늘은 40주년이 되는 장애인의 날이다. 솔직히 40주년이든 뭐든 특별한 감흥은 없다. 그런데 참 애매한 것이 개인에게는 경사스러운 날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욕스러운 날은 더더욱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오늘은 내 인생의 항해도 생각해 보았다. 비가 내린 이유 때문이라고 변명해본다.

 


내 상황에 대해서 알 뿐 아니라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경계까지만 생활하고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장애 그 자체에 대해서 연민을 갖거나 인정하지 않는 일은 없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장애 극복 프레임의 형태라면 이미 나는 장애의 궁둥짝을 걷어차 준 셈이다. 충분히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의연이 내게 긍정을 불어넣어준다면, 마치 조커의 이중성처럼 힘듦 또한 찾아올 때가 있는데 이래서 장애가 절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극복이나 정복이 불가능한가 보다 한다. 이른바 현실 자각 타임이다. 아무리 장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 안에서 만족하고 살아도, 거울을 보면 난 장애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겉모습의 문제가 아니다. 



휠체어의 의지하는 몸과 구부러진 한 손… 그리고 쓸 수 있는 다른 한 손마저도 부자유한 나 자신을 목도할 때, 새삼스러울 것 없으면서 부서지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응당해야 할 것들, 곧 인지상정을 행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서다. 



앞서 밝힌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선이라 일컬은 것은 인지상정의 영역이 아니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어디 최소한의 것들만 하고 싶은가. 아니다. 가끔은 욕심을 채워보고 싶은 자아가 꿈틀댄다.        



이때쯤이면, “도대체 당신이 이야기하는 인지상정이 뭐요?” 하고 역정 내며,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노릇



아들 노릇, 형제 노릇, 친구 노릇, 형, 오빠 & 동생 노릇, 사랑하는 이의 노릇, 세상 부조리에 맞서는 오지라퍼들의 노릇을 비롯한 이 글을 보는 당신들이 하고 있고, 또 하고자 염원하는 수만 가지의 노릇들 말이다. 이 정도면 인지상정 맞다고 인정받을지 모르겠다.



별것 아닌 것을 추구하며 염원하면서 내색할 수조차 없다. 내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행복이 내 평생 소망이요 바람인 상황에서 그럴 순 없다. 물론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단 건 아니지만, 내가 아파할 때, 듣는 청자들의 가슴은 찢긴다. 



하루가 지나 잠이 들고 다시 새로운 날을 맞아서 깨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어제의 흔적이 지워져서가 아니라 내가 모두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행복 이외에 한 가지 더 욕심부리는 것이 있다면 그 행복의 조각들이 나로부터 시작되어 흩날리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만일 현재 내 삶의 항해가 영화 속 댄 중위의 것보다 더 고독할 지라도 기꺼이 미소 지으며 담담히 감당해내리라.

    


본문 이미지는 “Unsplash”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Photo by DL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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