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편견 담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VEOFTEARS Jun 07. 2020

BlackLivesMatter와 장애인의 삶

감정과 생각은,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기에 침범받을 수 없다. 아니, 침범받아선 안 된다. 감정과 생각에 온도차가 있는 이유는,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이거나 혹은 어떤 가치를 삶 속에 우선 배치했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때문에 모두는, 가치가 다른 이들과 함께해야 하고, 그와 더불어 포용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선… 그러니까 개인의 호불호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만인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아니라고 답하는 이들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개인이 품은 어떠한 생각… 심지어 그것이 어떤 대상을 향한 부정적 감정이라고 해도 그것조차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들이 그에게와 그녀에게 얼마나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는지는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무조건적 포용을 위해서는,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느냐 끼치지 않느냐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앞서, 어떤 개인의 부정적 감정조차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고 한 이유와 나아가 잘잘못을 따지는 일을 미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정적 생각이야 좋지 않은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게다가 그것을 실천에 옮겨 누군가에게 전파하는 것은 더더욱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삶이 언제나 그렇듯 앎과 실천이 따로 놀듯이, 때때로 나 역시도 알게 모르게 어떤 대상을 이미 미워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주제넘게 감히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그 누구에게 하라고 하겠는가.



지금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다름 아니라 미움을 더 이상 개인의 생각 속에만 가둬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불호를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혐오의 영역으로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실화 시켜 누군가를 해하고 살인하는 데까지 세력을 넓힌다. 근래에 들어서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이 혐오의 실재를 알리는 기폭제가 됐고, 이것이 인류 전반의 평화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게 했다.




피부가 검은 사람은 흰 사람이 싫을 수도 있다. 반대로 피부가 흰 사람은 검은 사람이 싫을 수도 있다. 정히 싫으면, 그저 속으로 삭이면서 피해 다니면서라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



만일, 누군가에게 그런 이유로 지탄을 받는 일이 생기면, 한 번쯤 생각해 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잘못됐음을 깨닫는 시점이 오는 그때, 잘못을 인정하고, 편한 마음으로 잘 지내면 된다.



그런데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다. 한 번 생각해 보자. 피부색이 달라서 피해를 주었는가. 만일, 실제로 피해를 당했다고 해도, 그 정도가 과연 소중한 생명이 죽임을 당할 만큼의 사안인가. 생명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데, 과연 현재의 지구촌 속에 인간 존엄은 어디에 있나. 그러고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 알량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故 조지 플로이드가 겪은 사건 이후에, 세상은 온통 그의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예컨대 소셜 미디어 상에 검은색만으로 채워진 그림으로써 그를 추모한다든가, BlackLivesMatter (블랙라이브스매터, 흑인들의 삶은 중요하다)라는 해시태그와 목소리가 널리 뻗혀 나간다든가 하는 행보들… 꼭 필요하지만 너무 뒤늦은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DisabledLivesMatter 폰트 = 네이버 나눔 고딕 엑스트라 볼드.



BlackLivesMatter의 해시태그를 마주하면서 내 일처럼 조지의 죽음과 상황을 안타까워했던 이유는, 바로 장애인의 삶과 인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조지가 흑인을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더불어 흑인인 것이 잘못이 아니듯 장애인 또한 장애인을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장애인인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장애인은 잠재적 무시의 늪에 있으며, 무시와 천대를 그러려니 해야 하는 사람이다. 인권존중의 요구는, 내가 잘났음을 알아달라는 읍소가 아니다. 단지 조물주의 섭리 아래 창조된 있는 그대로의 존재임을 알아달라는 것이며, 동시에 너무나도 당연한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부조리를 알리는 최소한의 도구이다.



언제까지 누군가의 아래이며, 그들의 하대 속에 살아야 하는가. 누군가의 아래… 즉, 흑인은 백인들의 아래이며, 장애인은 비장애인들의 아래라는 기준을 누가 적립했는가. 그런 논문이나 연구자료가 존재하는가?!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 



버스나 지하철에 올랐을 때, 집에나 있지 왜 나와서 사서 고생이냐는 말을 듣는 것은, 천신만고의 삶 가운데 기회를 얻어 누리는 휴식을 방해받는 것이고, 행여 당신과의 충돌이 있을 때, 결코 당신만 재수 없는 것은 아니며, 또 아무리 당신이 가진 지식이 이 땅 가운데 최고라 할지라도 내 삶의 모습은 감히 당신이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



피부색이나 신체적 차이를 두고 인권을 운운하고 있을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은, 부족한 인권의 회복이야 말로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라는 점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부조리를 느끼는 모든 종류의 을들은,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손의 후손까지도 싸움의 결과는 명확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보통은 소셜 미디어에도 이런 글은 자칫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어 지양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올려 본다. 감정적이어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글의 스킬보다 ‘진정성’을 가지고 썼다는 점을 알아주시고, 읽어주시길 바랄 뿐이다.



#DisabledLivesMatter   

 


본문 이미지의 폰트네이버 나눔 고딕 엑스트라 볼드이며 무료 폰트임을 밝힙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독한 항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