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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Apr 23. 2020

상념을 펼치며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날것의 글일 것 같다







About Faith

지인들에게는 물론, 누차 이 곳을 통해서도 밝혔듯이 나는 크리스천이라 칭하기에 참 부족한 사람이다. 내 신앙을 목숨과 바꾸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그런 거국(?)적인 결심 말고, 생활 신앙인으로서의 당당함. 그런 건 없다. 말하자면 이렇다. 예컨대,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하는 물음에는 아멘하고 망설임 없이 답해놓고, 한편으론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내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두려움 또한 공존한다. 참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지 않은가.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에 입성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실재한다면, 단지 24시간의 삶을 살아내는 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앞서 이야기 한 걱정들에 기인한 기도 제목은 늘 똑같다. 



온 가족이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

온 가족의 화목

기타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는 것



과연 내가 왜 이러는지 그 요인을 생각해 봤다. 원인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십중팔구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 것 같았다. 물론 아침에 잠에서 막 깨어 의식만 세상에 도달해 있을 뿐, 눈꺼풀은 아직 꿈결에 머무를 그때에도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코로나 사태 이전과 동일하지만, 적어도 심적인 불안감은 요즘이 더 한 것 같다. 솔직히 가족들 중에 형님과 나는 국가적 차원에서 훈장을 줘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가격리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고, 다른 가족들 역시 꼭 필요한 일정만 소화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나에게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코로나 종식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그것은 모든 인류의 염원이다. 그러나 바람과 현실은 큰 괴리가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근본적 종식 선언은 치료제 및 백신의 접종과 복용. 그 이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린다고 다수의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고, 실제로 그리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향후,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오프라인 예배를 시작했을 때, 그때 나는 어디 있어야 하는가. 현장 예배를 소망하고,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만에 하나 하는 마음이 한켠에 존재한다면, 그 예배가 주님께 온전히 드려질 예배일 것인가. 또 그 점을 우려해서 연일 불참만 한다면, 내 믿음의 척도는 과연 얼마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새 매일 드는 생각 중 하나다.    

   






About Writ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집필에 열중한다. 하지만 언제나 작자라면 고민하는 것은 바로 이것! 좋은 글쓰기를 향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좋은 글의 절대 가치는 길이의 길고 짧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는 별개로 세간에서는 아직, 글만큼은 빨리빨리의 대한민국 문화와는 별개인 것 같다.



작자의 노고가 얼마나 들었든 많은 읽을거리가 존재하는 글을 독자들은 선호하고, 뿐만 아니라 브런치와 같은 글쓰기 플랫폼에서조차 장문의 글만을 선호하는 것 같다. 브런치만 봐도 단문의 글이 추천되는 경우를 자주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글이란 길고 짧음이 품질을 평가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다. 오죽하면, 하상욱 시인은 두 줄 시의 달인 아니시던가. 장문이 좋은 글의 기준이라면 그분의 글은 외면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정반대다. 그분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무릎이 탁 쳐지는 구석이 있다. 해서 많은 이들의 환호와 사랑을 받는다. 



아무튼 계속되는 고민의 결과는, 늘 특정 독자 혹은 특정 플랫폼이 원하고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지 말고, 나만의 길을 가자 하는 방향으로 이르는 것 같다. 가장 나다운… 나만이 맛을 낼 수 있는 글을 쓰다 보면, 비록 첫맛이 탁월하여 강인한 인상을 주진 못해도, 역으로, 이곳에선 다른 데선 찾아볼 수 없는 진솔함의 맛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책이 출판되든 되지 않든에 관계없이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언제까지이고, 매일 최선을 다할 것이다. 

      




About the Mind

코로나 정국이 가져다준 차분함의 아이러니는, 결국 나로 하여금 신앙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점검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다 보니 이와 더불어 나의 감정 상태도 되돌아보게 해 줬는데, 그간에 내 삶은 어쩌면, 척하는 삶 아니었나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 모든 것에 의연한 척. 같은 척을 많이 하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표현은 많이 하고 살았을지언정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유는 아마 짐작하시듯이 신체적 장애 때문이다. 솔직히 장애인에게 비장애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는 극적인 무언가다. 얼굴을 찌푸릴 일이 있어 찌푸리고 있는 사람 A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가 지금은 비록 찌푸리지만, 평소에는 주로 명랑 쾌활 발랄하다면 A의 찌푸림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위로해야 할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A가 주야로 찌푸리고, 자신에게 놓인 비극을 묵상함으로 모두에게 슬픔을 전달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는가. A의 찌푸림은 위로의 대상이 아니라 늘 그렇다는 비아냥이 더해진 회피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감정 상태는 과연 어디에 놓여 있나. 두 말할 것도 없이 전자다. [늘 맑은 편이나 때때로 흐리거나 비] 정도 될 것이다. 한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장애인은 늘 후자! 그러니까 자신이 처한 비극을 주야로 묵상하는 새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신체적으로 다르니까. 



물론 진짜 솔직히 말하면, 자유롭지 못한 몸은 경중을 막론하고, 비극의 재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왜! 그것은 힘듦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장애인들 중 소수는 아까 언급한 후자의 삶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부드리는 것은, 설사 그 누가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비난할 자격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같은 장애인의 입장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애에 오롯이 들어가 살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 사실은 장애유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절망에 놓여 있기보다 처절하게 하루를 살아내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혹여, 당신 곁에 누군가 몸이 불편한 이가 있고, 어느 날엔가는 만일 그와 그녀가 슬픔을 드러내거나 힘듦을 토로한다 하더라도 심중에 두려움을 넣진 말길 소망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다른 게 아니다. 인종이나 성별, 장애 유무, 또 어떠한 차별적 요소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소통의 연결 고리가 존재하면 좋겠다. 오늘 나 힘들어하면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대화할 때 겉으론 잘 받아 주면서 속으론 힘듦에 쩔어서는 종국엔 연락처 차단시켜 버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서로 경청하며 차이를 좁혀가다가, 나중엔 차이가 없는 그런 관계가 일상이 되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때로 내 감정이 꿀꿀할 땐 위로를, 기쁨으로 충만할 땐 한없는 축하를 받으며 살기를 소망한다. 



장애 같은 곁가지 때문에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위축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상이 그간의 상념이다. 어쨌거나 코로나의 종식이 하루속히 이루어져 이런 생각을 쏟을 새도 없는 바쁜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언제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라이킷 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이 기회를 빌어 감사의 말씀 전한다.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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