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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Mar 02. 2021

설날에 관한 짧은 이야기

Photo by Karolina Grabowska on Pexels



이 글은 한 달 전쯤엔 올려야 했을 글인데 지금에서야 올린다.



어릴 적 설날의 풍경을 떠올리면, 어머니의 정성 가득한 음식과 색동 한복,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 생각에 풍성했던 날이었다. 동그랑땡을 유독 좋아하는 나는, 명절엔 없던 입맛도 생겼다. 또 꼬까옷 입자면서 한복을 입혀주시던 부모님의 손길이 좋았다. 게다가 정말 많이 사랑했던 할머니를 뵐 생각에 설렜다. 비록 내 몸이 불편해서 남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든 큰집 방문길이었지만, 힘듦보다 예의가 우선이셨던 부모님의 성정에 나는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기사 따르고 말고가 어디 있겠나, 난 되레 좋아했던 풍경인데.



우리 집은 내가 다 클 때까지 친가와 외가 방문하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릴 때는 그렇게 좋아했던 풍경이 언제부터인가는 지독히도 싫어졌다. 아마 사춘기 시절 혹, 그 전부터였을지 모르겠다. 나 하나 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셨던 아버지의 기력이 이전 같지 않음을 느끼던 순간부터, 친 손자를 자신처럼 사랑하신 할머니께서 부자유스러운 내 몸을 볼 때에 반가움과 애잔한 슬픔이 공존한다는 걸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그리고 그게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신다는 걸 캐치했을 때부터.



그리고 어른들께 드리는 세배가… 그 어설픈 몸놀림이 어른들로 하여금 부모님을 안쓰러운 존재로 느끼게 할 수 있음을 안 순간부터 명절이 싫어졌다. 할 수만 있으면,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가기 싫었고 더구나 세배는 정말 하기 싫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마흔을 목전에 둔 현재의 나는 어김없이 설날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일환의 요인도 있고, 한없이 푸근했던 할머니께서도 천국에 계시고, 이젠 결코 적은 연세가 아닌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집에서 명절을 보내야 한다.



게다가 나 역시 점점 심해지는 몸 상태 때문에 이제는, 과거에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몸놀림의 세배 대신 목례로 드리는 세배로 대신해야 한다. 그렇게 난 최대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아버지와 엄마께 세배를 드렸다.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이 면구스러울 정도로 해드리는 것 아무것도 없는 나.



적어도 복을 빌어 드릴 만큼 효도를 해야 될 것 아니겠나. 아니, 효도는 차치하고서라도 제 앞가림이나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은…



그렇게 올해도 드리지는 못할망정 되레 부모님께 세뱃돈을 받았다. 받지 않겠다고, 당장은 쓸 일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결국 봉투는 내 바지 주머니에 담겼다. 참 많이 속상했다. 그 속상함의 이유는, 어릴 적 어설픈 세배의 몸짓이 떠올라서도 아니요, 오늘날에 건방지게 목례로써 세배를 간소화해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늘 부모님께선 다 괜찮다시며 자식에게 무한히 주시려는 마음. 어찌 보면 그 미련스러운 마음이 뭔지 짐작하는데, 그저 그 모두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제 속상한 마음은 잠시 거두고, 바람대로 천사 같은 우리 부모님과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주님께 기도드려본다.



Photo by Karolina Grabowska  on Pexels     

본문 이미지는 “Pexels”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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