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살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쓰게 된 건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어느 길을 산책할 때였다. 제주의 동쪽 지역에서 제주 시내로 들어오는 1132번 일주동로 도로가 삼양동 쪽으로 방향을 틀 때, 시내 방향으로 직진하면 ‘연삼로’가 시작되고 이 길의 왼편으로 한라산의 능선이 정상으로 모아지는 장엄한 풍광을 볼 수 있다. 정상 아래로 마치 새끼를 품은 것처럼 자리한 오름이 보이길래 지도를 찾아보니 아마도 ‘세미양오름’이지 싶다. 하긴 오름들의 가장 큰 형태가 한라산 정상이라 하니, 새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그 풍광을 좋아해서 오전의 이른 시간에 이 길을 이따금 걸으며 한라산을 바라본다. 어느 날은 연삼로 초입의 귤밭 앞에 서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 도로에서 보는 한라산은 영험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이 좋다. 영적인 체험이기도 하다. 수백만 년 동안 만들어진 용천동굴의 그것처럼 인간의 지혜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존재한 저 한라산의 늠름하고도 다정한 능선을 바라보며 영험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설픈 글 실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좋은 느낌을 전해 준다.
이 길을 걸으며 한라산을 바라 볼 때 영험하다는 느낌을 받으면 이내 나는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제주에서 살게 된 계기, 제주라는 자연 그 자체,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엔진소리와 제주의 관광 문화, 중앙 중심주의와 변방의 피해의식, 도시 중심적인 국가 정책과 상업 제도,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고찰과 소수성 안의 소수성 같은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는 한다. 집에서 나와 연삼로를 향하여 걷다가 귤농장을 지나 주유소와 공장을 지나고 삼화지구 아파트 단지를 지나오다가 삼양해수욕장 입구의 아치 건축물에 담긴 바다를 보면서 집으로 오는 산책코스 속에서 나는 많은 공부를 하고 사유를 얻는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길 위에서 한 공부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한라산은 보았을 것이다. 시적 은유가 아니다. 어설피 읽은 원자의 신출귀몰한 운동법칙을 들먹이며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한라산은 다 보았을 것이라고.
자신을 가운데에 두고 날카로운 것과, 뚫어낼 수 있는 것과, 태울 수 있는 것과 터지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베고 쏘고 태우고 죽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지금의 제주항, 오래 전부터 육지를 오가는 배들의 항구였다. 배가 점점 커지면서 규모도 커졌을 것이다. 근대식 상공업 제도가 정착된 일제강점기 시절 제주의 자원들을 일본으로 나르거나 했을 것이다. 당연하고 논리적인 추측이다. 실제로 제주항 바로 앞에는 ‘제주주정공장’터가 남아 있다. 일제의 수탈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한 공장으로 항공연료, 자동차 연료로 쓰이는 ‘주정’을 만들어 일본군에 공급하였다. 기름진 제주 지역의 땅을 빌어 재배한 ‘고구마’를 원료로 했으리라. 일제는 그처럼 치밀하게 악랄했고 그 잔재가 기어이 4.3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던가. 주정공장은 결국 4.3 유적지로 남았다.
4.3 때 산간으로 도망했던 제주도민들을 거짓말로 꾀어내어 내려오게 한 후 주정공장의 창고에 잡아 두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청년들은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가 6.25전쟁 때 대부분 학살 되었다. 남은 이들도 주정공장에서 죽거나 제주항 옆 사라봉 일대의 바다로 나가서 죽임을 당한 후 바다에 버려졌다. 사라봉과 별도봉 사이에는 작은 만 같은 해안이 있다. 아주 작다. 그곳의 물살은 김녕이나 협재 등의 바다와는 다르다. 거칠다. 검다. 돌이 많다. 양쪽으로 암벽이 솟아 있다. 물에 버려진 시체들이 밀려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곤을동 주민들이 시체들을 주워올 수도 있겠건만 그들도 한꺼번에 불 태워져 죽고 난 후 마을을 버려두어 지금까지 비어 있는 지경이니 그 작은 만에는 이름 모를 원통한 이들의 사연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한라산은 보았을 것이다. 큰 배가 드나드는 항구 앞 공장에서 죽고 바다에 버려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말이다.
육지에서 제주에 장기간 여행 오는 사람들이 흔히 찾는 키워드가 있다. ‘한달살이’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그들은 보통 자가용 승용차를 배에 싣고 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제주항에 도착한 커다란 배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 분명 그들은 70여 년 전 벌어진 학살의 터를 지나가게 된다. 이 글을 읽는 이가 제주항에 도착한 커다란 배에서 차를 운전하여 나오게 된다면 기억해 주면 좋겠다.
한라산은 보았을 것이다. 제주항에 도착하지 못한 또 어떤 안타까운 이들을. 저 멀리 진도 앞바다에서 가라앉은 커다란 배에 갇혀서 죽은 그들을, 보았을 것이다.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날도 4월의 어느 날이다.
4.3의 그것처럼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라고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국가’가 구조의 주체로서 기능하지 못했고 국가가 사고를 책임지지 않으려 했고 국가가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4.3의 그것과 여전히 같다.
대규모 자본가들을 보호하는 자본주의 상업제도와 그것을 국가 정책으로 보호하는 위정자들은 한 목소리로 변방의 목소리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다. 변방의 목소리는 주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단원고가 아니라 “강남3구 8학군”소재 고등학교 아이들이라면 세월호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시, 자본, 권력 중심주의적 기준의 국가정책의 틀을 예외적으로 깨트릴 수 있었을까?
4.3의 진상은 당시 ‘육지’의 해방정국과 평행하는 시선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결국 국가 권력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경계와 변방과 외부의 불온한 것들을 소거해버리려는 권력 본위의 시각에서 비롯된 거대한 학살이었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평범한 부모들은 자본주의 상업제도의 말단에 자리한 힘없고 가난한 경계와 변방과 외부의 존재들이다. 그들의 죽음이 국가 권력을 위협하자 위정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끊임없이 은폐한다. 기억 너머로 밀어낸다. 그들의 죽음마저 망각의 공간으로 밀어내니 두 번 죽이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중앙’이 하는 행동이다. 그 ‘중앙’은 예로부터 권력을 위협하는 이들의 생명을 빼앗는데에 능하다. 역사가 증명한다.
제주항 앞에서 죽은 이들, 제주항에 와 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 모두가 ‘중앙’이 아닌 존재들이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 그들이 ‘중앙’의 획책 가운데서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하다가 생을 달리한다. 지금도 변함없다.
세월호 사건을 겪은 세대의 청춘들을 알고 지낸다. 이 긴 글이 그들에게 힘을 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한 건 아마도 부채감 때문이었으리라. 선배 세대의 일원으로서 무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럼에도 이 조악한 글이 그들의 상실감을 위로하는 데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
그들 중 ‘아림’이라는 친구에게 물었다.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다음은 그의 응답 전문이다.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옮겨 본다.
“고 1 수업 끝난 이후 쉬는 시간에 속보 뉴스를 통해 세월호 사고를 접했어요. 저와 제 친구들 모두 얼어 붙어있다 조용히 교실 빔 프로젝터로 속보 뉴스를 틀고 점심시간은 물론 수업시간까지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또래(한 학년 선배들)였고, 제 친구들과 얼마 후 갈 수학여행에서 벌어진 사고였다는 사실은 제게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는 점에서 큰 두려움을 느꼈어요. 무엇보다도 이 구조현장이 생중계되면서 뭐라 한마디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는데, 이는 막막함과 답답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한 무력감, 국가는 물론 어른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 슬픔과 분노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그 당시는 불신이 커졌습니다. 사회와 어른에 대한 불신이요. 어른의 말씀, 사회의 규범을 따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떼죽음. 그건 비단 제주항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자본주의와 그것을 지탱하는 정치권력 사이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차례로 3,40여명 자살하기도 했다(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주인공의 전 직업이 쌍용차해고노동자였음을 추리하게 하는 회상씬을 기억해보자).
이른바 ‘중앙’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이 없다. '중앙'은 기어이 세대와 계급의 갈등을 빚었다.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의 부와 권력의 시스템에서 밀려났고 교묘하고 세밀하게 짜여진 시스템 속에서 착취 당하고 있다. 보다 더 본질적인 인간의 삶을, 세련되게 포장한 자본주의의 하위 담론들 이를테면 '공정'이나 '능력주의'같은 것들로 숨막히게 만든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우울하고 비교 국가 동일집단 구성원들보다 많이 자살한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저항은 무엇일까? 죽어 원통한 사람들, 여전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은 무엇일까?
잊지 않는다고, 기억하고 있다고, ‘중앙’ 본위적인 일체의 관념과 사상과 철학과 본성을 버리겠다고, 변방, 경계, 외부로 분리하는 인간적 본성을 버리겠다고, 여전히 힘없고 가난할 우리 후배들 자녀들 후손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중앙’의 것들의 위선과 획책에 대해 경고를 발하겠다고 말이다.
한라산은 보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죽어 마땅한 것들일지, 누가 모두의 기원 속에서 사랑받고 존중받을 것인지.
덧)
중앙본위적인 사고는 우리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 예를 들자. ‘길’은 사람이 통행하는 장소여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자동차를 만들고 도로를 닦아서 돈을 벌고 잘 살아야 한다. 국가 권력은 제도로서 보충한다. 기어이 ‘길’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다니는 장소가 되었다. 이 때 차도의 너비와 인도의 너비를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자동차 덕분에 인간이 조금 편해졌을 뿐이지 지구의 환경은 망가져간다. 돈, 권력은 전부 ‘중앙’에 있다. 집행하는 주체마저 중앙의 책상에서 중앙본위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 관료가 책상에서 만들어 낸 정책과 기관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본래 자리에 있었던 ‘진리’와 ‘이치’에 맞게 만들어진 것들을 수탈하며 밀어내었고 단 한 번도 그들을 위한 적이 없다. 우리는 진심으로 질문해 본 적이 없다. ‘길’이 사람이 다닐 공간인지 자동차로 채워져야 할 공간인지 말이다. 그 무지(無知)가 자라서 중앙본위적인 관념과 철학이 된다. 우리가 겪게 될 야만성은 결국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오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