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숨쉬는 마을

by 러브파리

책으로 모이는 마을은 따뜻하다. 고요한 문장 위에 삶을 포개며,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말보다 느리고, 음악보다 조용하지만, 책은 그 어떤 소통보다 깊은 울림으로 마음을 움직인다. 책을 통해 마음이 모이는 자리들은 마을 공동체의 뿌리를 천천히, 그러나 단단히 내리게 한다.


제주 구좌읍 ‘소심한책방’에서는 최근 ‘구좌당근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작은 모임이 시작되었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 책방 한 켠에 모인 이웃들은 책을 읽고 각자의 문장을 나눈다. 전쟁 중에도 책을 읽으며 서로의 마음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처럼, 이곳도 책을 통해 서로의 삶에 귀 기울이며 조용한 연대를 만들어간다. 아직은 작은 시작이지만,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이 시간이 마을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구좌의 바람결처럼 느리지만, 책을 향한 시선들이 모여 언젠가는 이곳도 책마을로 자라날 것이다. 그렇게 ‘구좌당근껍질파이 북클럽’은 작지만 분명한 공동체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런 변화는 비단 제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북 고창의 ‘책마을해리’는 책이 삶의 중심이 되는 공간을 오랫동안 꿈꾸며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책숲시간의 숲’, ‘책감옥’, ‘길게길게 책학교’ 등 독특한 이름의 공간들은 단순한 볼거리 그 이상이다. 이곳에서는 주민과 아이들이 함께 책을 읽고 만들며, 자연과 예술, 인쇄가 어우러진 ‘책 생태계’가 조성된다. 오래된 한옥과 통나무집 사이로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나무의 결이 문장이 되어 마을과 책이 하나가 되는 이곳은 ‘책이 곧 마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천천히 숨 쉬고 있다.


고창이 책으로 마을의 공간을 확장했다면, 경남 양산의 ‘평산책방’은 책을 통해 공동체의 중심을 지켜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손에서 시작된 이 책방은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 같은 열린 공간’을 지향하며 ‘책친구들’이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독서 모임, 전시, 낭독회, 공연 등 일상의 예술이 책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곳에서 책은 단지 읽는 대상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기억을 나누며 공동체의 마음을 짓는 도구가 된다. 평산책방은 조용히 책을 읽는 공간을 넘어, 함께 책으로 연결되는 살아 있는 책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전 우산봉 아래 자리한 ‘버찌책방’은 일상의 쉼표, 책 휴게소를 모토로 삼은 조용한 머무름의 공간이다. 관광객보다 지역민들이 더 자주 찾아와 책과 함께 일상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이 책방의 일상을 채운다. 책장에는 방문하는 사람들의 온기가 담긴 큐레이션이 펼쳐지고, 책방 곳곳의 작은 기록들은 이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흔적이 되어 남는다. 더불어 지역 학교나 축제에 직접 찾아가는 ‘이동 책방’은 아이들과 주민들에게 책과 마을을 잇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한다. 버찌책방은 사람과 자연, 책과 마을이 어우러지는 조용하지만 깊은 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처럼 책방은 더 이상 책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책을 사이에 두고 사람이 만나고, 삶이 오가며, 마을의 온기가 피어나는 자리로 변해간다. 이국환 교수는 『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에서, 유럽의 책방과 책 축제가 지역의 기억과 문화를 잇는 장소가 되듯,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머물고 싶은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한다. 책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삶과 예술이 스며드는 공간이 될 때, 책방은 세대를 잇고, 단절된 일상 속에 다시 공동체를 피워내는 조용한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볼 때, 고창의 책마을해리, 양산의 평산책방, 대전의 버찌책방, 그리고 제주 구좌의 북클럽은 모두 책을 중심에 두고 사람을 모으고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이다. 공간의 형태는 서로 다르지만, 그 안에는 공통된 믿음이 흐른다. 책은 이들에게 단지 읽는 대상이 아니라, 사람을 잇고 공동체를 엮는 살아 있는 중심이다. 이런 공간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풍경은 단순한 책방의 나열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삶이 엮이고 관계가 자라는 ‘책마을’이라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상이다. 책을 통해 일상이 문화가 되고, 이웃이 친구가 되는 그 마을은 지금 이곳 우리 주변에서도 천천히 자라고 있다.


삶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도시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런 마을을 그리워한다. 책이 중심이 되고, 사람이 이어지는 삶. 그런 곳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조금 더 느리고 다정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결국 서로의 삶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책방이라는 작은 숨결이 일으키는 조용한 연결이,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조용한 연결이 축적될 때, 우리는 단지 책을 읽는 독자가 아닌, 공동체의 기억을 나누는 이가 된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우리 동네에도 언젠가 그런 책마을이 생겨나기를. 건물을 세우기 전에 마음이 먼저 모이고, 수익보다 이야기가 먼저 피어나는 공간. 아이들이 자라며 책과 함께 숨 쉬고, 어른들이 서로의 문장을 천천히 배워가는 그런 마을.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시선이 필요하고, 마주 앉아 들어주는 두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며,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듯 이어지는 마음과 오래 쌓여가는 이야기의 두께가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이 단지 ‘지식’이 아니라 ‘삶’이라는 믿음이다.


그 바람의 작은 한 걸음으로 나만의 독서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아이들과 책을 나누는 시간으로 시작해서, 학부모들까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따뜻한 자리로서의 공간. 책을 중심으로 세대가 이어지고 마음이 닿는 조용한 흐름 속에서, 나는 오늘도 한 권의 책을 펼친다. 그리고 믿는다. 이 작은 만남의 시작이 언젠가 우리 동네에도, 책마을을 향해 천천히 이어지는 첫 문장이 되어줄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