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 정신, 영혼
스페인 산티아고 길 780km 여정은 총 3개의 파트로 나뉜다.
1. 육체의 길
단단한 결심을 하여 나선 순례길 여정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시작점인 프랑스 생장에서 모두 출발을 기념하면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남긴다. 과연 앞으로 자신들 앞에 펼쳐질 여정을 알기나 하는 걸까? 첫날부터 험산 준령 피레네산맥을 통과하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게 맞는 걸까? 괜히 친구들한테 큰소리치고 왔나. 이건 도저히 안 되겠는데…’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삶의 무게와도 같은 배낭을 메고 새벽부터 일어나 매일 20~30km를 걸어야 하다 보니 잠들어 있던 신체 각 부위가 깜짝 놀라 아우성을 지른다. 하루 8만 보 정도를 걸으니, 발바닥엔 물집이 잡히고, 온몸을 지탱하는 발목과 무릎이 시큰거리고, 잡동사니로 가득 찬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며, 며칠 걷지도 않았는데 스페인의 살기 등등한 태양이 나를 새까맣게 태워버린다. 육체의 길을 견뎌내야 다음 여정으로 넘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생기긴 하겠지만, 다음 여정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육체적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함정이니 조심하길 바란다.
2. 정신의 길
발바닥의 물집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굳은살로 바뀌어 가고, 그동안 무심했던 나의 무릎과 발목을 밴드로 소중히 감싸 안아 주며 달랜다. 배낭 안의 짐들은 버리고 버려 최대한 가볍게 만드는 와중에 함께 순례길을 걷는 동지들과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육체적으로 겪던 고통이 어느 정도 견딜만해질 즈음이면 어느새 자신이 정신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반복되는 하루, 지루한 평원, 게다가 이쯤이면 충분히 걸었고 순례길이 어떠한 곳인지를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되지 않았나? 굳이 이 길을 두 발로 다 걸어야만 하는 건가? 내 무릎도 성하지 않은데 그냥 버스 타고 다음 마을로 넘어가 버릴까? 벌써 절반 정도 왔는데 이젠 맘만 먹으면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쯤에서 순례길은 접어두고 주변에 유명한 관광지에 들러서 맛집 탐방을 하는 게 낫겠다.’ 초심은 사라지고 유혹이 난무하는 정신의 길에서는 의외로 육체의 길에서보다 포기하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인생이란 게 뭐 언제는 계획대로 된 적이 있더냐!
두 번째 여정을 간신히 지나쳤다고 해서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유혹을 졸업하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여정에서도 여전히 그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렇게 몸과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다음 여정은 바로바로…
3. 영혼의 길
당신이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리고 옆에서 누군가가 그 길을 걷고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 걸겠는가? 그렇다.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왜 이 길을 걷게 되었나요?’ 이전 두 여정을 거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 질문을 100번쯤 던지고 그에 대한 자신의 스토리를 100번쯤 말했을 것이다. 그러다 이젠 말하기도 지쳐서 홀로 걷다 보면 어느덧 산티아고에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게 된다. 고된 여정을 마치게 된다는 사실에 기뻐할 것 같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순례길은 마치 자신의 인생 여정과 비슷하게 느껴지고 산티아고는 뭐랄까 천국 같은 곳이랄까. 이제 마지막 코스인 요단강만 건너면 인생의 모든 역경을 뒤로하고 기쁨이 넘칠 것 같지만 그동안 걸으면서 만났던 수많은 인연과 사건들, 성장한 자신의 모습과 성취들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마무리하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런 것일까? 지난 여정들에 대해 질척거리는? 그다음엔 뭐가 있을까? 신, 천국, 지옥이 있다면 그 신은 날 천국으로 인도할까, 지옥으로 내던져버릴까? 이 길을 다 마치고 돌아가면 성당이든, 교회든, 절이든 한 번 다녀볼까?
놀랍지도 않다. 위 3가지 여정은 순례길을 선택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적용하게 되는 수학 공식 같은 것이다. 인생의 위기를 맞아 스스로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사람이나 아무 생각 없이 싼 맛에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에 가볍게 온 사람이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공식 때문인지 이 수업을 마치고 나면 모두가 철학자와 시인이 된다. 육체와 정신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해지고 영혼의 깊이가 최소한 5cm는 깊어진다.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 길이 그런 3단계의 여정으로 이루어진 길이기 때문이다.
복잡하지 않다. 그냥 배낭 메고 걸으면 된다. 영어를 잘해야 할 필요도 없고, 생각만큼 많은 돈도 필요 없다. 계획을 잘 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이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며, 서로 소통하게 하고,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복잡한 삶을 살아온 그대는 단순한 진리를 심오하게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그 길을 믿고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