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산모 뱃속에서 존(John)은 만족스럽다. 평온한 태반, 따뜻한 양수 속. 세상 소음은 산모의 장벽을 거쳐 한층 부드러워지고, 눈을 뜨지 않아도 안전하다.
‘이런 게 삶이라면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다음 생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그 모험을 한단 말인가.’
운명에게 나이를 묻는다면 7살이라 하지 않을까. 평온함은 지루함의 다른 말이며, 지루함은 종말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운명의 눈에 걸려들면 그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 원망하지 마라. 운명 역시 자신의 운명대로 살아갈 뿐이다.
존은 당황했다. 겨우, 이제 막 행복을 느껴보려던 참이었는데 운명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참견을 시작했다. 산모의 심장 박동수가 빨라진 것 같다. 뭔가 다급하다는 듯이 세상이 출렁거렸고 존의 속도 울렁거렸다. 참을 수 없어서 발버둥을 쳤다. 그냥 그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더 끔찍한 재앙이 시작됐다. 안전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벽이 점점 좁혀지는 것이 아닌가!
“진짜 그만 좀 해!”
운명을 향해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구멍 난 어항에서 물이 빠져나가고, 물고기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반대편으로 헤엄치듯, 존은 살기 위해 손으로 벽을 밀치고 발로 차 댔다. 벽이 그를 조여와 숨을 쉴 수 없었다. 자신이 거하던 안전한 세상에 대한 미련이 약간 남아있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향수에 취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야만 한다. 집중하자. 죽으란 법은 없다.
벽을 더듬었지만 꽉 막혀있고 이제는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그때, 운명이 장난의 피날레를 장식하려 했다. 존은 머리 꼭대기, 그러니까 정수리 쯤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이게 뭐지? 다른 세계로 관통하는 문인가? 왠지 저기로 가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느낌이다. 운명이 갑자기 돌변하여 내 편을 들어줄 리 없다! 저기로 나가는 순간 내 온몸은 굳어서 딱딱해질 것이 틀림없다. 영원히 고통받는 곳, 지옥이 틀림없어!’
그러나 문제는 벽이다. 벽이 꿈틀거리며 존을 더욱 압박했고 그를 문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아직 문이 완전히 열리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모든 것은 운명 때문이야! 만나기만 해 봐라!’
그러나 한 뼘 남짓의 작은 몸은 딱 그만큼의 에너지만을 담고 있었기에 작정하고 조여 오는 세상을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난다고? 한 번도 종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과거의 삶을 청산해야 할 시간인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즐거웠다. 그동안 고마웠다. 다음 세상에서도 잊지 않으마. 두고 봐라. 내 결단코 잊지 않으마’
묵직하게 주먹을 쥐며 떠본 적도 없는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고독하다. 홀연히 왔다가 사르르 녹듯 사라지는 존재라니. 나는 누구였던가. 이젠 상관없다. 나를 반겨주고 안아주던 모든 환경에 감사할 뿐이다. 좁다란 문이 나를 옥죄어 오니 죽음을 감각한다. 이 문을 통과하면… 나는… 이제…’
머리가 문을 통과하자 나머지 신체는 아무 생각도 없이 머리를 따라 나왔다. 이제 모든 게 끝이다.
‘이럴 줄 알았다. 나를 부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 나를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공기. 누군가 성급히 나를 들어 올리고, 날카로운 것을 갖다 대며 설겅설겅 내 생명줄을 자른다. 좀 전에 강한 압력에 내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말로 진짜 죽음을 겪게 되는구나. 여기가 지옥이란 곳이구나. 내 양 옆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슬픔의 눈물이다. 나는 이제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들어왔구나. 이 운명에 나는 저항할 것인가, 투항할 것인가. 아니, 나에게 그럴 힘이 과연 남아 있을까.’
고통 때문인지, 속절없는 슬픔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존의 입에선 한 번도 내어 본 적 없는 괴성이, 눈에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를 보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을까.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활짝 웃고 있는 걸까…’
그렇게 존은 이제까지의 삶을 정리하였다. 이것이 확실히 죽음라고 불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런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언뜻언뜻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함과 차가움, 배고픔과 포만감, 축축함과 뽀송함 등의 감각들이 내 몸에 채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지각이 생겨나고 언어를 배운다.
경험이 쌓이고 인식이 흐른다.
시간은 또 흘렀다.
다소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머리가 희어진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된 존은 만족스러웠다. 크진 않아도 포근한 집과 다정한 가족, 평온한 마음 상태…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마치 처음 경험해 본다는 듯이 그는 되뇌었다.
‘이렇게 끝난다고?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즐거웠다. 모든 것에 감사하다. 그러나 죽음이란 것은 참으로 고독하구나. 홀연히 왔다가 사르르 녹듯 사라지는 존재라니. 나는 누구였던가… 이 문을 통과하면… 나는…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