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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수다방

무거운가?

왜 그리 가벼운걸까?

by 조운생각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쩌겠나.

꺼내는 말마다 사람들을 주목시키는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왜 쳐다보는지 오해하고 있다.

그래, 모르는 게 약이다. 저 환한 미소를 보라.

어느 영화 대사처럼 ‘해맑고 지랄’이다.


자막이 궁금해진다


목수가 되기 위해 지원한 학원. 긴장되는 마음으로 등원한 첫날, 2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21살부터 65세까지. 나는 딱 중간이네. 후훗. 어딜 가나 중추적 인물(!)


선생님의 지시로 각자 소개를 한다. 어색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름, 나이, 사는 곳을 밝힌다. 처음 누군가가 그 정도 소개면 적당하다는 듯 스타트를 끊자 모두가 미리 짠 듯이 똑같은 형식에 내용만 바꾸어 인사를 해 나갔다.

그리고 그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000입니다. (회원증을 내밀며) 멘사 회원이고요,
영어를 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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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노가다판에 멘사 회원이라. 영어는 얼마나 잘한다는 거야? 나이도, 사는 곳도 밝히지 않았다. 강조점은 분명했다. “여기가 어디든 상관없다. 내가 접수하겠다. 날 우습게 보지 마라…”


수업이 시작되자 그가 왜 그렇게 자기소개를 했는지 알게 됐다. 그는 정말 우습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한마디를 하시면 “뭐라고요?” 교실 맨 뒤에 앉아서 큰 소리로 묻는다. 선생님은 친절하게 방금 했던 말을 반복하시고는 다음 말을 이어간다. 그는 작정한 듯 “뭐라고요?”를 반복한다. 강의가 진행이 안된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린다. 헛웃음도 나온다. 간신히 한 가지 기술을 배우고 각자 실습을 할 때면 그는 또 외친다. “선생님, 잘 안 돼요, 못하겠어요” 선생님이 시작하라고 한 지 1분도 안 됐다.

선생님 몸에 사리가 생기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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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진행하는 도중에 핸드폰이 울린다. 진동도 아닌 음악 소리가. 누구겠는가? 다 알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금방 끄겠지’ 하지만 그럴 리 없다.

“헬로우! 하이! 와썹맨! 아이엠 스터딩! 예쓰 예쓰 예쓰…”

이 친구야... 플리즈…


점심시간이 됐다. 누구는 사 먹으러 나갔고, 누구는 싸 온 도시락을 풀어 옹기종기 모여 먹는다. 그 친구는 옆에서 주춤주춤 서 있다. “점심 안 싸왔어요?”라고 묻자, “네, 안 싸왔어요” 하며 웃는다. 해맑다. 삶은 계란이라도 좀 먹으라며 누군가 권하자 고맙다며 얼른 받는다. 그러곤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잠시 후 또 전화벨이 울리고 그가 낼름 받는다.

“헬로우! 오, 마이, 가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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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던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내 에너지를 다 빼앗겨버렸다. 분명 밥을 먹긴 먹었는데 힘이 없다. ‘내가 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하나 둘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데, 그 친구는 움직이질 않고 가만히 있는다. 멍하니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뭐 하는 걸까. 기를 모으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 생각이 났다.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멘사 회원카드와 영어를 언급한 걸 보면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닐까.

쉽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목수일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일단 꺼내든 것 같은데.

20여 년을 살아오면서 아픈 일이 참 많았겠구나 싶다. 다시 생각해 보니 좀 전에 봤던 그의 멍한 얼굴에서 상처와 무거움이 엿보였던 것 같다. 그걸 가리고 싶었던 것일까.


무거운 과거를 가리기 위해 때로는 나도 가볍게 행동하곤 한다. 균형을 맞추려는 무의식 작용인지, 아픔에 대한 반발인지 잘 모르겠다. 혹시 그 친구도 그런 걸까? 내가 너무 앞서 갔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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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그 친구한테 다가가 실없는 농담이라도 던지며 말을 걸어봐야겠다. 위장전술인지, 사회성 결여인지, 방어기제인지, 아니면 그냥 해맑고 지랄인 건지.


To be a light for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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