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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수다방

도쿠시마 여행기

6. 여행의 묘미_특히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

by 조운생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혼자 여행하라.

산티아고 때도 그랬다. 발에 불이 나도록 걸은 뒤 도미토리에 도착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맥주를 들이키면서 ‘오늘도 빡쎘다잉? 내일은 얼마나 빡쎌까?’를 시작으로 하나가 된다. 나이 성별 국가를 불문하고 그저 다 동지가 되고 각각의 인생 스토리를 나누는 매직 스테이션이 펼쳐진다.

이곳 일본의 도미토리도 마찬가지. 무거운 배낭을 침대 맡에 내려놓고 홀(hall) 쪽으로 내려오면 다들 지쳤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은 핀란드 35세 남성. 레게머리를 한 키 2미터에 가까운 거인이다. 거구에다가 온몸에 문신을 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려던 찰나, 자신은 수학선생이라며 방어전에 나선다. 묻지도 않은 그의 커밍아웃에 불현듯 내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생각난다. 별명이 ‘조폭’이었는데, 길 가다 그런 사람의 눈을 두 번 쳐다본다면 그는 참 용기 있는 사람이다. 선생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 치고도 저 정도 인상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험악했고 키도 크고 온몸에 근육까지 두르고 있는 양반이 분필 잡고 로그함수를 가르치고 있다. 핀란드 친구와 우리 수학 선생님의 공통점은 둘 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을 지녔다는 것이다. 잠시 고뇌에 빠진다. 외모란 뭘까.


다음 이야기를 나눈 친구는 스위스에서 온 29살 여성. 시코쿠 순례길을 오늘로 완주했다면서 발바닥의 물집을 보여준다. 내가 걸었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800km 정도지만 이곳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은 1,200km인데 88개 사찰을 방문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평지보다는 산이 많고 험해서 함부로 도전하기 힘든 코스인데 그걸 해내다니. 비결을 물었다.

“많은 정보는 오히려 우리를 혼미하게 하므로 빈머리와 빈마음을 가지고 오면 해낼 수 있습니다.” 아마 지갑은 꽉꽉 채워 왔지 싶다. 그녀는 이제 머리만 깎으면 될 것 같아 보였다. 88개 사찰을 다 돌면 저렇게 불자가 되는 건가.


마지막으로 벨기에 청년. 일본이 너무 좋아 가방을 앞뒤로 들쳐메고 두 달째 일본을 여행 중이다. 그가 사는 곳은 벨기에 시골인데 인구수가 300명이라고 한다. 그곳이 좋으냐고 묻자 “좋긴 좋은데 좀 피곤하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고 나 혼자 젊은이라서 나한테 관심들이 엄청 많다. 내가 누굴 만나는지, 어디 갔다 오는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를 다 알고 계신다.”라고 한다. 청년이여, 몰랐는가? 인간은 먹을거리만 필요한 게 아니다. 가십거리가 또 상당히 중요하다. 벨기에 할머니들에게 인기 많은, 젊고 잘생긴 그 청년의 건투를 빈다.


그들의 스토리가 얼추 마무리되면 내 이야기도 나눈다. 모두들 흥미롭게 듣는다. 어쩌다 한국인이 모로코에서 사업을 하며 살게 되었는지,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다는데 그곳에서 난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제는 목수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려한다는 등.


그들의 일기장에도 내 인생 스토리가 재밌고 신기하게 적혀지겠지.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재해석될 내 인생 스토리를 슬쩍 훔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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