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 화 )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가출
내 기억엔 없지만, 나 태어나기 전 우리 부모가 만나는 역사가 있었고 오빠가 태어나고 언니가 태어났다.
내 아이가 나에게서 태어날 때처럼 나도 나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다가 밖으로 ‘응애~’하며 나왔겠지.
다른 점은 주변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날 세 번째로 나으셨다.
장손에게 시집왔으니 당연히 둘째 아들을 기대했다고 했다. 엄마보다 아버지 쪽 어르신들께서.
그리고 외할머니께서도 이쁨 받으려면 장손이니 그래도 아들 둘은 돼야 시집에서 좋아할 거다 하시며 한 명 더~라는 응원과 성화에 5년 후 내 여동생을 막내로 엄마는 '이제 고만!'을 외치셨다.
내가 태어나서 2-3년 정도 지나서 셋집에서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했다. 거기서 내 기억이 시작되고 그곳에서 중학교 1학년때까지 살았다.
이사 간 건 기억에 없지만
결혼하고 나서 힘들 때 가끔 생각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이니 내 나이 4살? 쯤일 것이다.
엄마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단다. 오빠가 언니와 나를 끌고 엄마를 데리러 예전에 살았다는 집에 갔던 기억이다.
고아들처럼 졸라니 서서 방에서 놀라서 나온 엄마를 보고 '엄마~ 집에 가자.' 했던 순간의 장면이다.
하루정도도 안되어서 엄마가 이사 가기 전 세 들어 살던 집에 계시다고 초등학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빠에게 그래도 첫 째라고 그 집주인아줌마가 알려준 듯했다.
솔직히 왜곡된 기억인지 아니면 오래된 사진과 오빠 언니들이 하는 말과 함께 섞여서 만들어진 이미지인지 모르겠는데 마치 카메라가 사진을 찍듯 그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함께 기억나는 두려움
'엄마가 정말 우리랑 같이 안 살면 어쩌지?' 했던
하지만 엄마는 우리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허둥지둥 장을 보시어 맛있는 밥을 지어주셨다.
이 기억이 비교적 생생한 이유는
집에 온 엄마가 또 나가자 우리들이 놀라서 두려워하며 '엄마 어디가!' 했던 순간과 장 봐오셔서 상 차려 주셨을 때의 안도감과 밥상을 보고 신나던 마음이 교차하며 기억 메모리에 저장을 넘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어색했을 거 같은 아빠와 엄마의 대면은 어찌 이루어졌는지 관심밖이었나 보다. 기억에 없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40이 안된 30을 좀 넘은 나이?
엄마에게 아빠는 너그럽고 다정하고 경제력이 좋은 남편은 아이였다.
알량한 양반 타이틀만 있을 뿐, 몰락하고 물려받은 것 없고 아래로 동생들이 줄 줄이고 위로는 뒷짐 지고 지적질하는 어른들이 줄 줄이고, 자존심과 까탈스러움만 남은 집안의 장손이 우리 아버지였다.
가진 것 없어도 후덕한 복 만드는 집안도 있던데 친할머니는 그런 분은 아니셨고 친할아버지는 기억에 없다. 집안 어르신들에게도 별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어른 역할을 못한 채 자식들에게 불만과 가난만 남기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시절 많은 남자들이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무너진 자신을 일으킬 방법과 힘을 가지지 못한 채 나이를 먹고 조선시대를 거쳐 일본어를 배우는 눈칫밥 먹는 시절을 이겨냈나 싶더니 전쟁을 지나 힘든 세월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 못한 남자들이 허다하던 시절.
그 끝자락에서 만난 우리 부모님도 쉽지 않은 결혼생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나누면서도 한쪽으로 그 책임이 몰리던 시절. 먹이고 입히고 챙기는 몫은 여성에게 있었다. 남성은 남성대로 고민이 없었겠냐만 많은 부분 자신의 자존감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엄한데 그 탓을 넘기는 비뚤어진 방법이 묵인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양반의 껍데기를 벗으려 나름 애쓰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 보니 아버지의 표현에 불만이 있었던 건 고생하는 부인을 보며, 드글거리는 주변의 습관과 싸우느라 쏘아대면 안 되는 화살을 엄마에게 불쑥불쑥 쏘아댄 일이다.
그중 하나가 붉어져 엄마가 못 참고 하루 가출을 하신 게 아닐까?
나도 살아보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부부사이에 참 많이 일어난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보태어 그렇게 서운 할 수가 없다.
아버지라고 고민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엄마의 고생은 세상이 다 알아주는 고생이니 우리 형제들에게 엄마는 늘 위로받고 효도받아야 할 존재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원망은 아버지에게 돌아갔었다.
그래서 이제야 아버지가 안쓰럽게 내겐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고생 많았던 엄마. 엄마와 아버지 성격을 이러저리 섞어놓은 내가 양쪽에 위로의 말을 전한다면 두 분의 노고가 좀 녹아질까요?
겨울비 내리는 날, 빗물이 나의 엄마 아빠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