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살의 문장들

(제9화) 엄마의 김장

by 보리수

김장하는 날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한옥이 닥지닥지 붙어있는 막다른 골목의 끝에 있었다. 대문을 마주 보고 오른쪽은 다른 집 담과 대문이 있었고 왼쪽은 바로 이웃한 집의 대문이 있다.

오른쪽 담을 따라 어른키 높이의 배추가 쭉 쌓여있다. 배추를 리어카로 나르는 아저씨는 차곡차곡 쓰러지지 않게 예쁘게 쌓아 놓으셨다. 골목에 흩어진 배춧잎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배추를 나른 흔적들이다.

하루는 배추와 무를 사서 이웃집벽에 성곽처럼 쌓아놓고 그다음 날은 엄마가 골목에서 배추와 무를 다듬는다. 겉대를 떼어내고 나면 노란 연둣빛으로 바뀐 배추들이 부피를 좀 줄여 다른 쪽에 일렬로 도열된다. 무청과 분리된 무들은 마당으로 들어가 때를 벗기고 씻어서 대야에 뽀얀 자태로 무들끼리 뒹굴거리게 쌓아놓는다.

밖에서 지저분한 초록잎들을 떼어내고 들어온 배추들은 반씩 쪼개져서 소금물에 풍덩 빠져서 재워진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하굣길에 쌓여있는 배추들을 보며 이벤트가 있는 날처럼 나도 모르게 신이 나던 내 모습이다.

수북한 무채에 고춧가루를 뿌리면 순식간에 빨갛게 물이 들고 소금을 만나면 숨이 죽고 갓이며 파며 마늘 생강 젓갈이 들어간 김치 속은 건저 낸 배춧물이 빠지는 동안 이리저리 섞이며 무쳐진다.

아줌마들과 함께 여럿이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배추에 김장 속을 넣다 보면 옆에서 쪼그리고 지켜보던 내 입은 벌겋게 화끈거리고 커다란 독에 차곡차곡 김치가 쌓이면 엄마는 돼지고기를 삶아 그날의 김장 속과 굴과 함께 마루에 앉아 절인 배추속대에 쌓아서 먹었다.

너무 속을 많이 먹어 다음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일어나는 에피소드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김장의 풍경이다.

언제부터인가 담장의 배추들의 양은 줄었고 우리는 이사를 가서 마당에 벌려 놓은 배추양으로 김장을 마무리하는 정도로 점점 대식구를 위한 김장은 우리 가족을 위한 김장의 양으로 줄어들어갔다.

그리고 엄마가 쓰러지던 해에는 김장을 못했고 그다음 해부터 엄마의 지도하에 어설프게 가족들이 김장을 소박하게 했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시댁에서 얻어먹다가 양평으로 이사 오면서 매해 사연을 앉고 자충우돌하며 나의 김장의 역사를 쓰고 있다.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게 농협에서 김장장이 열리면 나도 모르게 설 뜰 해지며 배추며 무며 파며 갓이며 사고 싶다.

새우젓도 미리 사다 놓아야 할 것 같고 마늘이며 생강도 미리 사서 양념을 만들어 놔야 할 것 같다.

일이 생겨 한 해를 건너뛰고 사다 먹은 적이 있다.

정신없이 김장철이 지나가 버렸지만 마음한구석이 허전하면서 시간을 버니까 편하고 좋은 반면 입맛에도 안 맞고 아까워서 김치찌개조차 끓이지 못했던 경험을 겪고 나니 어김없이 김장철이 되면 몸을 추스르며 김장준비를 위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조금만 하리라 마음먹었건만 벌써 동치미도 담그고 김장 전 맛보기로 간단 김치를 만들었다. 이거 하느라 하루가 다 가버렸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했는데, 무가 별로라 걱정반 맛있길 바라는 기대반으로 김치냉장고에 낑낑거리고 넣다가 엄마 생각이 났다.

허리 아프다 무릎 아프다 하면서 매번 웬 배추를 그렇게 많이 사냐고 했던 식구들을 흘기듯 쳐다보시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난 엄마처럼 아프면서까지 집안일 안 할 거야 했는데 엄마가 하늘에서 그러실 거다.

‘고만해라. 그 정도면 실컷 먹는다. 이제는 사 먹어... 힘들게 하지 말고. 나보고 뭐라 하더니... '

'동치미는 담갔고... 그래... 올해 배추는 얼마나 담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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