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살의 문장들

(2화) 기억의 시작

by 보리수

저편에 있는 내 기억은 조용하다.

이상하다.

언제부터인지 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은 안되는데 장면은 음소거 티브이를 시청하는 것처럼 떠오른다.


엄마는 부엌에서 상을 차리고 우리 사형제는 마루에서 투닥거리며 놀고 있다.

엄마의 상이 마루로 올라오면 러닝과 팬티 바람으로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밥을 다 먹으면 한쪽으로 밀고 엄마는 쟁반을 들고 오고

오빠는 마당 수돗가 양동이에 담겨있던 수박을 가져온다.

항상 수박을 가져오면 엄마가 제일 궁금해했다.


'잘 익었을까?'

매년 돌아오는 수박구입은 엄마에게 스트레스와 동시에 복권 긁는 심정 아니었을까?

어느 때는 쩍 하고 벌어지는 수박 속에 실망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빨간 수박에 환호할 때도 있었다.

난 수박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무한대로 수박이 뱃속으로 들어갔다.

내 기억 속 한 장면은 잘 익은 수박을 양재기 끼고 먹는 모습이다.

턱밑으로 줄줄 흐르는 수박물은 어떤 때는 내의를 적시기도 하면서 언니와 서로 수박 흐른 내의를 보며 놀리곤 했다.

어떨 땐 턱 밑이 따가워 오기도 했었던

배 불뚝이가 되게 수박 먹던 아무 걱정이 없던 시절이다.


그런 여름 어느 날

오빠가 친구들과 수영장을 간다고 하더니 동생들을 데리고 갔다.

실내 수영장이 처음으로 생기던 시절.

그 동네에서 애들은 아마 다 놀러 갔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레일을 치고 있던 모습이 아니라 놀이동산에 있을 법한 수영장 모습으로 기억한다.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가는 중간만 레일과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깊은 곳에서 오빠는 아직 어렸던 나를 어깨에 얹어서 친구들과 장난하며 놀았다.

난 과격하게 노는 오빠들이 재미있었다.

물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어깨무등에서 물로 다이빙도 시키고 물속에 오래 있기도 하며 재미있게 놀다 집에 와서 그냥 뻣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배탈에 설사에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었다.

아팠던 통증의 기억은 별로 없는데 '내 배가 등에 붙었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은 난다.

허리를 필 수 없을 정도로 못 먹고 토하고 설사하던 나를 엄마는 무척이나 딱하게 생각하셨을 거다.


그렇게 며칠을 힘없이 누워있는데 엄마가 오빠랑 언니랑 동생을 데리고 수박을 윗목에서 먹고 있는 거다.

여름이라 방에 불이 들어오던 계절은 아니지만 나는 아랫목에 누워서 잠이 들었었다.

나름 안방 상석을 아픈 나를 위해 배려했던 거라 방에 자리는 윗목밖에 없었다.


내가 잠이 들어서 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수박 먹는 소리에 난 잠이 깼고 못 먹는 줄 알면서 약 올리려 수박을 안방에서 먹나? 싶어 서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잠결에 엉금엉금 기어 수박잔치를 벌여놓은 쟁반 앞에 앉아 엄마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엄마는 '그렇게 수박이 먹고 싶니?'


토하고 설사하는 나에게 미음 외의 음식을 주는 게 조심스러웠을 거다.

미음도 잘 먹지 않고 누워있던 나는

내가 봐도 내 인생에 그렇게 말랐던 적이 없었을 텐데 엄마는 나를 가엽게 여겨 수박하나를 넘겨줬고 난 그렇게 받아먹은 꿀맛 수박을 잊을 수가 없다.


어렸을 때 나의 만병통치약은 박카스였다.

아이한테 안 좋다는 걸 성인이 되어 알았지만 난 소화가 안 되어도 머리가 아파도 바카스를 먹으면 낳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바카스보다 그때 수박은 그때 나의 위장을 달래 준 첫 음식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때는 식중독이었던 것 같고 그다음 크게 또 한 번 탈이 났었는데 팥찐빵을 먹고 꼭 체한 일이다.

아마도 위가 좀 약했었나 보다.

지금도 감기약이나 항생제 조제약을 먹으면 위가 아플 때가 많다.

신경 쓰면 위경련이 나고...

"꼭 체했던 기억"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그 기억은 내가 어렸을 때 겪은 일이지만 나의 삶의 중심을 잡아가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60살의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