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살의 문장들

(4화) 팥찐빵 먹고 체한 일 - 무서운 꿈 (2/2)

by 보리수

며칠 만에 눈을 떴다.
엄마와 의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안방에 누워 있었다.

옆에는 스테인리스 대야와 물수건이 있었고, 안방 중앙에 깔린 요 위엔 두꺼운 이불이 반쯤 제쳐져 있었다.

내복만 입은 채로.

의사는 청진기를 거두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지는 것 같네요. 열이 내렸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 그렇게 말한 것 같긴 한데, 정확한 말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의사가 나간 후, 엄마의 걱정 어린 얼굴이 선명히 기억난다.


기억엔 '며칠간 정신을 잃었다'라고 남아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실제로는 하루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그냥 두고 있을 엄마가 아니니까.

아마도 하루 이상 깨어나지 않자 놀란 엄마가 의사의 왕진을 부른 것일 것이다.


평소 무뚝뚝하고 근엄하던 동네 의사가 직접 우리 집까지 온 걸 보면, 그만큼 엄마는 겁이 났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어쩌면 ‘체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었고,

그 말을 팥빵 사건과 억지로 연결 지으며 그 상황을 스스로 각인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30년 넘게 팥 들어간 음식은 손도 대지 못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엄마 얼굴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전까지의 세상은 온통 캄캄했다.
나는 어둠뿐인 공간에 혼자였고, 사방은 검고 높은 산들로 가득했다.
그 산을 기어올라야만 했다.
맨손으로 바위 같은 산을 오르며 손이며 발이며 긁히고 까졌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겨우 하나의 봉우리를 넘으면 또다시 똑같이 생긴 검정 봉우리가 나타났다.
산은 끝도 없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안 보였다.

간신히 올라간 산 위에서 본 광경은 절망적이었다.

뿌연 안갯속에 검정 봉우리들만 보이는데

나무하나 없는 봉우리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서 암담함이 느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계속해서 다음 봉우리를 향해 기어올랐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손가락 끝에 힘을 꽉 주고, 발가락으로 바위틈을 붙잡았다.
그 산은 차갑고 거칠고 무섭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반복 속에서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멈출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딘가에서 빛이 들어왔고,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나는 눈을 떴다.

그 순간이 내가 ‘살아 돌아온’ 순간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잠깐 저승의 문턱을 넘었던 게 아닐까.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든 생각이다.
내가 꿈속에서 기어오르던 그 끝없는 산은 혹시 수미산을 향한 여정이었을까?

그 꿈은 당시엔 너무도 무서웠지만, 이후로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죽으면 또 저런 어둠과 산을 지나가야 할까?’
‘우리 엄마는? 우리 아빠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런 어딘가를 지나가야 하는 걸까?’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풍경,
검은 산들과 텅 빈 세상은
왜 내 꿈에 나타났던 걸까?


몸은 예전의 식중독 때보다 훨씬 더 야위어 있었다.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했고, 엄마가 날 일으켜 앉히고 죽을 한 숟갈씩 떠먹여 주어야 했다.

그때 엄마가 한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너 안 깨어나는 줄 알았어…”

내가 만약 안 깨어났다면... 솔직히 너무 무섭다.

계속 그 검은 바위산을

끝없이 오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이른 나이에 깨달았다.

죽음이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두렵다는 생각.

이걸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끔 현실을 살면서 잊기도 하지만 이 생각은 무엇을 결정할 때

고민을 해결할 때 바탕에 깔리는 내 지표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난 그때가 떠 올랐다.

그래서 열심히 마지막까지 부모님의 귀에 대고 속삭여 드렸다.

"저 여기 있어요. 언제나 함께해요.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거예요.

걱정모두 내려놓으시고 당신만 생각하세요. 그동안 너무 애 많이 쓰셨어요.

편안하신 곳으로 환한 불빛을 찾아가세요. 저도 함께 할 거예요. 제가 기도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찾은 종교에서 말해준 방법으로

부모님도 아시는 방법으로

기도문을 읽어드렸다.

알 수 없지만 도움이 되셨기를 지금도 간절히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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