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그때 크리스마스 (1/2)
그때는 한 달 전부터 설레었다. 그런 크리스마스가 있던 시절로 돌아가본다.
40년 전 정도? 그러고 보니 참 오래전이다. 막 대학교 입학하면서 고등학교와 가까이 있던 광화문에 위치한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서 대학 합격 후인지 전인지 알 수 없지만 여유로운 시간에 마음은 들떠있고 12월 성탄절이 가까워 올 때 친구가 성탄절 행사가 있다고 가자고 해서 선뜻 따라나섰다. 오래된 교회지하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연극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작은 선물을 주며 화기애애하고 즐거웠다. 여중 여고를 다니다 보니 남학생을 본다는 일이 설레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 가면서 학교 외의 또래들이나 대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새롭고 무엇보다 교회분위기가 차분하고 좋았다.
그러다가 청소년과 분리되면서 성인반으로 가야 되는데 친구가 성가대에 들자고 해서 음정만 맞출 줄 알면 된다는 말에 함께 성가대에 들어갔다. 오래된 역사가 있는 교회지만 소박했고 내가 다니던 시절 주 목사님과 사모가 무척 진보적이고 획기적인 분이셨다. 말씀이 편협하지 않았고 사실 기독교에 딱히 호감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나에게 거부감 없는 설교가 늘 맘에 와닿았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드는 의문들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아 있었지만 교회의 분위기와 그때 목사님 덕분에 성가대 활동을 오육 년 정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인상적인 일들도 많았고 여러모로 학교밖의 세상을 알게 해 준 시기였다.
회사 다니면서 소원해지고 성가대는 새로운 신입들로 채워지고 그렇게 결혼 후 다니던 교회와는 멀어졌다.
나중에 신문에서 그 당시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봤다.
지금까지 계시다면 요즘의 변질된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말을 할지 무척 궁금하다.
나의 아버지는 종갓집 맏아들이다. 7대의 제사를 지내다가 박정희 시절 가정의례준칙으로 3대 제사로 줄여서 지내오셨고 엄마가 아파서 못 지내는 걸 늘 마음에 두셨던 분이다. 내가 살던 보문동에서는 작은 교회가 어마무시하게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 여섯 채 건너에 있었던 교회가 이웃이 되도록 확장시키며 오래도록 공사하며 저지른 소음과 진동에 나의 어머니는 무척 힘들어했다. 나도 이른 아침부터 바위 쪼는 소리에 중학교 시절을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금도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쪼는 소리를 들으면 불쾌감이 바로 올라온다. 그래서 큰 교회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그런 마음이 항상 있었는데 광화문 교회는 오래된 역사에 비해 조용하고 진보적이었고 검소했다. 그래서 더 이 교회에 마음이 갔는지도 모른다. 불안하던 시기 그 목사님의 말씀으로 나의 불안을 다독이며 20대를 보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일요일은 쉬는 날이 되었고 교회친구들도 각자 자기 동네로 많이 흩어졌다. 크리스마스는 구세군의 종소리와 반짝이들이 걸리며 외로움이 커지는 날이 되거나 그저 하루 쉬는 날? 과 함께 또 한 해가 가는구나 하는 쓸쓸함을 느끼며 그래도 성탄이브나 당일 아침에 교회에 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결혼하고 쉬었던 종교생활이 아이가 크면서 성당으로 옮겨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남편과 시댁이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나도 몇 번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험을 하며 뭐 꼭 교회가 종교생활의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미 일요일은 나를 쉬게 하는 시간이어야 했다.
아마도 내 아이들이 안 태어났다면 종교생활을 이어갈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다니던 광화문의 교회와 같은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큰 아이가 “ 엄마 죽으면 어떻게 돼?” 하며 밤마다 분리불안으로 잠드는 것을 괴로워하는 해답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계기였다.
그러다가 성당 다니는 유치원 학부모를 따라 함께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예전의 그 교회가 떠오르며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아이들에게도 설명할 자료가 생겼으니까.
나는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는데, 성당에서 다시 세례를 받고 아이들도 유아세례를 받았다. 기독교보다 좀 더 형식이 있던 성당 미사에 적응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일요일마다 가서 미사를 보면서 아이들이 무엇보다 기도할 수 있는 구체적 중심이 생겨서인지 안정감을 느끼는 게 보였다.
설명이 곤란하거나 힘들어하면 "성모마리아께 기도해" 또는 "하나님께 기도해"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난 그거면 만족했다.
주말이 너무 바빠지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이 가면 신나 했고 내가 양평으로 이사오기 전에 다니던 성당 신부님은 너무 좋은 분이셨다. 더욱이 아이들 미사를 봐주시는 신부님은 여러 가지 분장도구를 가져와 아이들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신 분이셨다.
그때 그 젊은 신부님은 선하고 밝은 목자셨던 건 틀림이 없었다.
남편하고 주말부부를 하면서 아이들이 3살 6살 이렇다 보니 성당다니면서부터 더 주말이 바빠졌다. 그때 느낀 내 종교생활에 대한 생각은 ‘어렸을 때는 무슨 행사만 하면 신났는데 어른으로 종교생활을 한다는 건 참여해야 할 경제적인 것도 시간적으로도 책임 질 게 많네’ 라며, 힘들지만 아이들이 즐겁고 편안해하니 그 걸로 족하던 시절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