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살의 문장들

(제15화) 그때 크리스마스 (2/2)

by 보리수

아이들 미사에 참여했을 땐가? 어떤 상황에서 눈물이 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젊은 신부님이 뭐만 하면 눈물이 났다. 내가 육아로 힘들 때여서인가? 하긴 교회 다닐 때도 눈물이 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별 감흥이 없다가 그 신부님의 노래라던가 설교라던가 무슨 울림인지 모르게 내게 울음꼭지가 가끔 틀려졌다. 아이들 앞이라 애써 안 운 척 하지만 지금도 그때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천주교가 내게 딱 맞는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오래가지 못했다. 무슨 인연인지 잘 가꾸고 맺어온 생활을 뒤로하고 양평행을 결정하며 그곳 생활을 청산해야 했다.

양평으로 이사 왔지만, 한 번 뿌리내린 종교생활에 대해 아이들에게는 모범을 보이는 엄마이고 싶었다.

이사 온 양평집에서는 성당까지 차를 몰고 15~ 20분쯤 가야 한다.

오래된 골목 안에 위치한 양평성당은 초보운전자인 나에겐 난코스였다. 차를 몰고 무사히 성당까지 가는 일이 늘 난제였다. 골목으로 일단 들어서면 두세 번 우회전 좌회전의 좁은 코너를 통과해서 성당 주차장에 이르러야 한다. 성당담장 안 주차장에 들어서면 도우미분께서 차곡차곡 주차하도록 유도해 주는데 미사가 끝나면 뒤차가 뺄 때까지 안쪽에 있는 차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매번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바람에 입구 쪽에 대니까 뺄 때는 미사가 끝나면 잽싸게 나와서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빼면 된다.


매번 그래도 허덕 허덕 거리며 잘 다녔다. 그런데 그날은 성탄 이브였을 것이다

이사 오고 첫해는 성탄절 느낌이 하나도 안 났다. 일찍 캄캄해진 겨울의 양평은 읍내만 좀 성탄트리장식이 상점에 군데군데 있을 뿐 교회 십자가에 장식한 트리만 쓸쓸하게 보일 정도로 길이 한산했다. 대부분 일찍들 문을 닫고 술집 몇 군데 사람들이 있었을 거다. 그래도 애들한테는 신나는 날인데 성탄이브에는 어떤 이벤트라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작은아이 5살 큰아이 8살에 이사하고 맞은 첫 크리스마스는 친정식구들과 전원주택에서 나름 파티흉내를 내며 손녀들의 재롱잔치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선물잔치로 좋은 추억이 만들어졌다.

그다음 해에는 성탄이브 미사에 도전했다. 미사는 밤늦게 시작했다. 그날도 역시 차를 몰고 들어가는데 코너에 주차되어 있는 트럭으로 길은 더욱 좁아져 있었다. 매번 초치기로 다니니까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진입을 시도했는데 왼쪽 긁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여기 닿았다.” 난 놀라서 뒤로 뺏다. 빼면서 또 ‘쓱’ 차 긁히는 소리가 났다. 다시 넣어다 뺏다 두세 번 하다가 이거 큰일 났다 싶어 내려서 보니 트럭 잠금쇠가 밖으로 삐지고 나와서 내차를 벅벅 긁어주고 있었다. 상대차에는 손상이 전혀 없었다. 희미한 불 빛에 보이는 죽 거진 차의 스크레치를 보니 더 이상 이거 힘들겠다 싶어서 그날 뒤로 빼서는 그냥 집에 왔다. 주변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엔 멀기도 했고 주택가여서 밤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많아서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 미사를 포기해야 했다.

‘엄마 집에 가?’

‘으... 엄마가 차를 못 대겠다.’


아이들은 실망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성탄 미사를 드리기로 하고 남편의 도움을 받았다.

그다음 해에 또 한 번 남편의 도움을 예약해서 성탄이브미사에 도전했다.

성탄이브미사... 내가 사실 깡다구는 있지만 체력이 저질이라 그런가 12시를 넘기는 미사를 조는 아이들을 데리고 끝까지 참여하지 못한 채 그날이 계기가 되어 성당에서 하는 성탄미사와 이별한 셈이다.


주중에는 멀리 출퇴근하는 남편이 일요일 하루 쉬는데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여유로운 주말을 반납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바쁘게 성당을 오는 일이 점점 쉽지 않았다. 게다가 주차도 힘들고. 내게는 버거운 일 투성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쥐꼬리 신앙심밖에 없던 나를 감동시켜 주는 신부님이 이곳에는 안 계셨다.


아이들도 일요일 하루 노는데 서둘러 깨워 성당에서 어른들과 꼼짝없이 앉아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아 하는 걸 넘어서 싫어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학교 보내듯 데리고 나와서 멀뚱하게 나만 바라보는 내 아이들을 두고 난 봉사활동을 해야 하니 그 봉사도 마음은 봉사가 아니었다.

하루 중 잠깐인 듯한데 성당을 다녀오면 하루가 다 지난 듯 저녁 준비에 바빴다.


‘아... 힘드네’


시큰둥한 아이들과 체력적으로 하루하루 바닥 치는 생활이 반복되는 건 좋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나는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할 계기를 맞이했다. 물론 그 이후로 성당을 다니기는 했지만 점점 멀어지면서 마무리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종교적으로 한 길을 가기엔 줏대 없는 마음가짐이었다.


나를 위주로 생각하던 사고방식에서 아이들이 내 판단근거를 제공하다가 다시 나를 보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바뀌듯이 나에게 종교를 대하는 자세도 바뀌고 있었다.

지금은 절에 다닌다. 남편은 내게 이슬람만 빼고 다 돌아다닌다고 하며 놀림반 말하는데 이제사 닻을 내리게 된 거 아닌가 싶다. 돌아 돌아 제자리로 온 것 같은 느낌.

이건 오로지 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누구도 그 사람이 믿는 종교에 대해 난 말할 자격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가 그랬다는 것뿐.


나에게는 점점 성탄절이 종교를 넘어 즐거운 명절처럼 느껴진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기쁜 날이지만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며 지나와 태어난 병오년을 내년에 맞이하는 나이가 되니 예쁜 장식들이 보이면 기분이 좋고 연말을 맞이하는 축제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날이라고 해야 하나?

돌이켜보면 나의 조급함이 무리하게 성탄절의 의미를 찾아주려 애썼던 것 같다.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맘. 종교적으로 의무를 해야 할 것 같던 시절. 우왕 좌왕하며 줏대 없이 굴던 엄마를 보며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몇 년 되었다. 큰아이는 좋아하는 사람과. 작은아이는 오래된 친구들과 보내고.

올해 남편과 나는 성탄절날 노견을 돌보며 보냈다. 솔직히 그 전에는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일 없이 하루를 보냈으니 잘 보낸 거다.

그렇게 올해 크리스마스가 지나갔고 좀 있으면 2025년이 마무리된다.

2026년 병오년이 얼마 안 남았다. 붉은 말이 온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60살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