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두려움이 무엇이든, 이것을 상상하고 내려놓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내면에서 떠오르는 두려움들에 대한 저항을 계속 내려놓으면, 곧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두려움도 바닥이 나고 만다. 이런 훈련을 충분히 오랫동안 계속하다 보면, 가만히 앉아서 '가장 큰 두려움', 즉 나는 관 속에 누워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관 옆을 지나쳐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드디어 다룰 수 있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떠올리는 것이 다름 아닌 신체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곧 우리이며,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럴 때는 다른 두려움이 일어날 때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자리에 가만히 앉는다. 그리고 하나의 딱지, 생각, 개념에 불과한 죽음을 내려놓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환상이나 생각, 믿음만 갖고 있을 뿐, 죽음의 실체를 경험한 적은 없다. 마음속에서 하나의 환상처럼 죽음에 딱지를 붙일 뿐이다.
죽음을 떠올리고 죽음의 느낌과 감각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으면 정말로 놀라운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을 겪어내고 전체 경험보다 더 큰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도 살아남았음을 깨닫는 것이다.
유일한 보호책은 우리 경험의 근원이 바로 자신임을, 우리 경험의 지배자가 바로 자신임을, 자신이 두려움보다는 더욱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우리의 두려움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그런데 당연한 두려움 따위가 왜 있어야만 하는가? 위험성을 더 이상 끌어당기지 않을 정도로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즉 자신의 선택으로 이런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데이비드 호킨스, [치유와 회복]
우리는 육체의 존재가 아니다. 육체의 존재로 인식할 때, 죽으면 그야말로 우리의 존재는 끝이 나는 것이므로 수많은 집착과 불안과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 두려움의 최후 단계는 죽음일진대,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다면, 이것이 끝이 아니라면 그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다행히 인간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였다. 죽음은 우리 존재의 끝이 아니라고. 우리는 영혼의 존재이므로 그저 빛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곳이 고향이다. 무한히 펼쳐진 부드럽고 빛나는 초원과 같고 오감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동시에 느껴지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이 삶에서 우리 눈에 비치는, 마치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는 세계, 즉 외부 요인에 따라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와 분리하여 바라보는 외부 세계라 함은, 내가 의미있는 선택으로 촬영하고 마음의 필름에 현상하여 상영되는 거란다.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는 현실세계란 도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이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환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매트릭스부터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영화가 떠오르면서 잠시 혼란이 왔다. 지금의 현실이 모두 내가 선택하고 창조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어떤 표현이나 비유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괴롭지만 더 '나'를 살피고, 지나간 경험과 습관, 생각 패턴 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내가 겪었다 생각했던 불행,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같은 것마저 내가 선택한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여기서 잠재의식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도처에 깔린 실재성을 종종 무시하고는 원하는 대로 바라보고 해석하기를 즐기는 것은 분명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파도 속에 그냥 그런 것이다라고 마음이 대답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철저히 매몰되었던 덕분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노력 끝에 지금까지 다음의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 죽음은 우리 존재의 끝이 아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지금의 삶을 살면 된다.
· 삶은 신의 선물이다. 우리가 오감을 통하여 세상의 아름다움과 풍요와 사랑을 누리기를 바란다.
· 모든 선과 악,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등은 우리의 습관적 이원화의 결과물일 뿐이다.
· 삶의 목적은 우리의 끝없는 성장이다.
· 우리는 빛과 사랑의 존재다.
삶이 신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개인의 고유성을 증명한다. 각자 삶의 모양대로 깨닫고 배울 것들이 그러한 경험 뒤로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설정한 경계를 넓혀 갈 때, 그 모두가 내게 좋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떠한 것을 온몸으로 통과하여 겪어내면서 배운다. 내가 선택한 모습으로 내 삶을 경험하며 깨닫고 경지를 넓힐 때마다 비로소 그 단계의 앎을 위한 고통이나 불행의 경험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사는 것이다.
나는 모태 신앙도 아니고 왠지 그럴 것 같다는 가느다란 믿음에서 시작하여 지금껏 이어온 사람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지금껏 의아하던 수수께끼가 드디어 풀렸다. 나를 완전히 죽인다는 것. 신은 분명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인데 의지를 가진 나를 어떻게 완전히 죽일 수 있는가? 이는 그저 비유가 가득한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남기고 해석한 우리의 한계에서 온 것이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호오를 없애는 것이다. 내가 자라면서 지내온 문화적, 사회적 환경, 이전 세대의 거짓 신념들이 쌓이고 단단하게 굳어져 마치 진리인 양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이를 통해 끝없이 판단을 하고 그 생각에서부터 감정과 행동 또한 나온다. 내 속에 저절로 떠오른다 느끼는 감정마저 사실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갇힌 생각의 쳇바퀴에서 용기 내어 떨어져 나올 수 있다면, 내 모든 것들을 통제할 지혜와 힘을 갖게 되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발견했다. 성실한 관찰자로서 나를 바라볼 터였다. 언제나 깨어있어 나를 알아차리는 현존의 상태로 들어가려는 중이었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니 개안한 듯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신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그 사랑을 나누며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것 외에 절대적으로 좇아야 할 것이 더 있을까. 내가 선택할 감정과 행동의 기준은 타인을 향해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랑이 전부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찰방찰방 차올라 넘쳐흐를 때 드러난다.
우리 인생의 지배자는 바로 나 자신임을, 나는 두려움보다는 더욱 큰 존재임을 인정한다. 두려움, 위험성을 더 이상 끌어당기지 않을 정도로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역시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