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퇴사’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선명하게 들어온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갑자기 닥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강하게 권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평범한 어느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였다. 늘 타던 시간, 늘 서던 자리, 늘 바라보던 창밖 풍경.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사람들 틈에 껴 흔들리는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길이 내 인생의 전부여도 괜찮을까?”
문득 그런 질문이 마음속에 들어왔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조금 달라 보였다. 회사라는 공간은 내게 안정과 안전을 주는 울타리였다. 월급은 매달 정확히 통장에 찍혔고, 그 돈은 대출 상환과 생활비, 아이들 교육비로 흘러갔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기에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직장에서의 성과와 직함은 나를 설명해 주는 명확한 언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온전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퇴사’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여겼다. 누군가는 용감하게 던지고 나간 선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불가피한 상황에서의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퇴사를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불성실하거나 무책임한 태도로 느껴졌다. 가장으로서, 중년 직장인으로서, 그런 상상조차 사치라 여겼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작은 균열은 점점 넓어졌다. 몸은 여전히 출근길에 섰지만, 마음은 종종 다른 곳을 향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겼다. 단순히 당장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일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거대한 축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며, 내 생각과 에너지 대부분을 일에 쏟아붓는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이 결국 나를 설명하는 셈이다. 그런데 그 설명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보고서와 실적표가 쌓여갈수록, 오히려 내 안의 공허함은 더 커졌다. 퇴사라는 생각은 실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니?”
“너는 진짜 무엇을 원하는가?”
처음에는 이 질문들이 불편했다. 나 자신조차 명확히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분명했다.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까?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사회적 시선은 어떨까? 그러나 원하는 것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자유롭고 싶다.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 그런 소박한 욕망뿐이었다.
퇴사는 어쩌면 단순히 회사를 떠나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다시 묻는 계기다. 지금의 자리를 버티고 유지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다른 길을 생각해야 한다. 그 길이 반드시 퇴사일 필요는 없지만 퇴사라는 상상은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매일같이 회사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조금씩 다른 풍경을 그려보았다. 알람 없이 일어나 산책을 하는 아침, 아이와 함께하는 낮 시간,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이어가는 밤. 그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꿈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금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작은 희망이기도 했다.
결국 퇴사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현실이다. 그것이 20대의 첫 직장일 수도 있고, 40대의 중년 전환점일 수도 있으며, 60대의 은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퇴사라는 단어 자체가 아니다. 그 단어를 떠올릴 때 드러나는 나의 감정, 나의 욕망, 나의 두려움이다. 그것을 직시하는 순간부터 퇴사의 의미는 달라진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삶을 다시 정의하기 위한 질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 질문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지금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