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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 Mar 14. 2023

히키코모리 생활 청산기 2

나만의 관계성 구축하기

언니가 결혼을 선포했다.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나의 좁디좁은 인간관계는 가족과 정말 희박한 빈도로 만나는 소수의 친구 몇 명이 전부였다.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는 언니였는데 언니는 정말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함께 가주고 또 일부러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아와 가보자고 권해주는, 어디서도 이런 언니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이 관계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빠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언니는 언니만의 소중한 관계들을 구축하고 있었다. 동생은 아직 어리지만 나와달리 인싸 타입이라 누구보다도 인간관계를 잘해나가는 아이다.


차라리 내가 관계의 소중함을 모르거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면 '인생은 혼자다.'라며 마이웨이를 가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히키코모리가 되기 전, 고등학교 생활을 돌이켜보면 난 친구를 정말 좋아했다. 친구에게 손편지나 작은 선물을 주며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에 행복을 느꼈고 친구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아침에 깨워 같이 도서관을 갔다. 야자 끝나고 집으로 가는 하굣길에 친구와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 데려다주길 반복하다 겨울밤 손 떨며 돌아가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등학교 수험생활이 제일 힘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수험생활이 제일 행복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나가고 주변 사람들도 열심히 사랑했기에.


이렇게 써보니 스스로가 놀랍다. 이렇게 관계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내가 히키코모리 생활을 그렇게 오래도록 유지했다니 마음 한구석 얼마나 허전함이 가득했을까. 그래도 혼자서 하나만 반복하는 고독의 시간도 값지기에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다. 다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부산에 온 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용기를 내어 잊고 있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연락하기까지 한 명 한 명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일단 염치없이 느껴질까 봐 두려웠고 많은 세월이 흘렀기에 나도 친구들도 너무 달라졌을 것 같았다. 더불어 히키코모리 생활을 오래 지속하다 보니 먼저 손을 내미는 방법을 까먹어버렸다. 하지만 만나고 난 뒤 '진작 빨리 연락할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친구들이 반갑게 맞이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더불어 일하던 곳에서 계약이 끝난 뒤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때 잊고 있던 그림에 대한 애정이 다시 돋아났다. 성인이 된 이후 스케치북이나 태블릿으로 가끔 그리긴 했지만 직접 붓을 만지니 사뭇 특별하게 느껴졌고 욕심이 생겼다. 내 마음을 담아두기보다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


그 외에도 이 시기에 새롭게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줬고 부산에서 시작한 독서모임도 히키코모리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는 도움이 되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머릿속에서 떠돌던 생각이 많은 나에겐 함께 배우고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고 특별했다. 이후 서울에 와서도 독서모임은 꾸준히 하고 있는데 배움과 소통을 사랑하는 나로서 독서모임 덕분에 많은 에너지를 받고 성장하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히키코모리 생활은 청산하고 앞서 말했듯이 서울로 이직을 하게 되어 2년 동안의 고향살이를 정리하고 다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아직 관계에 대한 벽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건 내가 내향인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나로서 나다움을 유지하는 선에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


'한의사'는 나를 상징하는 여러 키워드 중 내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것 중 하나다. 앞으로는 또 어떤 키워드를 얻게 될지 모르겠다. 히키코모리였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도 전부 '나'이며 소중하다. 이 모든 나의 모습이 쌓여 내 마지막을 만들 생각을 하니 조금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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