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누구에게나 마치 지운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나에겐 그게 한의대 6년, 대학생활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순간들이 없다. 나는 한의대를 다니는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보냈다.
한의대 6년은 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과에 진입하면 1교시부터 9교시까지 수업이 빡빡하게 짜여 있다. 해부시즌에는 수업이 모두 끝난 뒤 저녁을 간단히 먹고밤마다 해부학교실에 가서 실습을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외에 온갖 수시(수시로 치는 시험)들이 난무했고 시험을 못 치면 유급이 되어 1년 등록금을 날리고 다음 해에 그 학년을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유급을 면할 정도로만 공부를 하면 술, 게임 등 딴짓들을 꽤나 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거기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무언가에 몰입되어 끊임없이 의미를느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무언가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모호하게 알고 있는 감각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런 내게 가장 눈에 띄는건 한의대 공부였는데 잠재적앎이 몰입과 반복을 통해 명확해지는 과정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잦은 시험은 두려우면서도은근한 기대심을 불러일으켰고내 앎의 수준을 증명받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게다가 공부를 하면 혹시 내가 유급을 당하지 않을까라는 불안도 사라지고 장학금까지 받으니 당시 내겐 최상의 선택지였다.
공부를 하다가 히키코모리가 된 건지 히키코모리가 되어 공부만 한 건지 모르겠다.나는 배운 내용을 이해하기전까진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잠을 자거나 밥도 먹지 못했다.나는 술도 게임도 아닌 공부에 중독이 되어있었다. 당시나는 타인과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에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보니 내 인간관계는 그나마 랜선을 통해 매우 희박한 빈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고등학교 친구 몇 명뿐이었다.
진짜 6년 동안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냐고 추궁한다면, 그건 아니다. 스스로가 버거울 때는 방구석에 박혀 그림을 그리거나 혼자 키우는 고양이 호두랑 놀다가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한의대는 토익, 대외활동 등 다른 스펙에 대한 압박감이 없기 때문에 방학엔 적당히 공부를 한 뒤 여행을 떠났다. 생각해 보니 혼자 다녀온 40일 유럽여행은 내 20대 초반 몇 안 되는 귀중한 추억 중 하나다.그리고연애는알아서 했으니 걱정 마시길.
아무튼 나는 공부중독 히키코모리가 된 덕분에멘사회원, 서울대 졸업생 등 똑똑한 동기님들 사이에서 전 과목 A+장학금을 받고 본과수석으로 졸업하여 한의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