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고시에 합격해서 한의사가 되면 남자의 경우 군복무를 위해 공중보건의 또는 군의관을 가고 몇몇은 수련의(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과정)가 되며 대부분은 로컬 한방병원, 요양병원, 한의원에서 봉직의로 일을 시작한다.물론 임상 한의사에 한해서이며 연구, 대학원 등 다른 루트도 다양하고 졸업 후 바로 개원을 할 수도 있다.
의대는 수련의 과정을 밟고 전문의가 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한의사는 전문의 비율이 10% 정도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수련의가 되는 것을 선택했는데 수련에 큰 뜻이 있었다기보단 학교 성적이 괜찮았고 현역(20살 입학하여 휴학 없이 졸업)이니 수련의로 일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주변의 조언들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나를 잘 몰랐고 그렇게 어영부영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굳이 타 병원에 지원하고 어렵게 합격을 했지만히키코모리로 살던 나에게 처음 맞이한 병원문화는 너무 차가웠다. 구구절절 얘기하기엔 후폭풍이 두려워서 생략하고, 군대는 가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병원문화를 군대와 비교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주변 동기들에 따르면 분위기가 좋은 수련병원도 많으니 수련의를 생각하는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너무 겁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됐든 당시 내가 갔던 병원은 여러 문제가 많아 이후 수련병원 지정취소를 받고 악명 높은 곳으로 유명해졌다.
게다가 주 6~7일 근무와 이틀마다 당직(당일 퇴근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까지 병원에서 밤새 근무)까지 해야 하니 수면패턴이 어긋나면서 전반적인 건강이 망가졌다. 그렇게 오고 싶던 서울에 와놓고 휴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오프날엔 잠을 자기에도 빠듯했다. 나는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전부 소진되었고 머릿속엔 나쁜 생각이 가득했으며 처음으로 삶에 위협을 느꼈다. 결국 몇 차례 윗분들과의 면담을 통해 중도이탈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수련의를 관둔 건 이전까지 정해진 루트를 어려움 없이 빠르게 달려온 내게 첫 이탈이자 첫 실패였고 당시 내겐 충격이 컸다. 하지만 충격이 가시기 전에 나의 서울 월세방 계약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내 삶을 영위해야 했다. 당시 경력 없고 어린 여자 한의사의 서울 취직은 쉽지 않아서 나는 경기도까지 왕복 3시간을 다니며 일을 시작했다.
한의사 봉직의로 일을 하게 되면 주말, 공휴일 근무(설, 추석연휴에 일하기도 했다.)가 기본이고 월차는 없으며 3~5일 정도의 몇 없는 연차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일찍이 개원할 생각이 있는 분들은 쉬는 날에도 교육을 받고 이것저것 준비하기 바쁘다. 주변 한의사들을 보면 생활 패턴 자체가 직장인과 다르다 보니 자연스레 같은 업종 사람들과만 어울리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경기도, 서울, 인천 등 여러 지역을 오가면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퇴사를 권고받았다. 직장인이라면 코로나 때문에 잘릴 수 있냐며 어리둥절하겠지만 한의원은 매출이 중요하고 운영에 있어서 부원장 월급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업계에서 나 외에도 잘린 부원장들이 허다했다. 오랜 자취생활과 잦은 지역이동, 내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심신이 지쳤던 나는 8년간의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도망치듯 본가로 내려갔다.
전문직, 한의사라고 하면 큰 걱정 없이 안정적일 거라는 시선이 만연했지만 당시 내 삶은 그러지 못했고전문직이라는 편견 아닌 편견 덕분에 삶의 고충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한의사는 고연봉을 받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수련의 월급을 들으면 다들 놀랄 것이다. 수련의는 일하는 시간에 비하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봉직의 또한 높은 페이는 체력이 좋은 남자 한의사에게만 보장된 일이며 체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여자 한의사는 피부, 다이어트, 소아 등 다른 특화 기술을 터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성인이 된 후 직업을 말하면 내게 무언가 기대를 하는 눈빛을 보내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참고로 나는 인터넷에 떠도는 한의사 월급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고 지금은 봉직의로 일을 하지 않을뿐더러 앞으로도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생각은 1도 없으니 접근하지 마시길.
이렇게 마무리를 지으려 하니 한의사라는 직업을 그다지 좋지 않게 묘사한 것 같아 한의사로서 느끼는 장점들을 덧붙여본다. 일의 보람은 비교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건강해지도록치유하고 도와주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뿌듯한 일이다. 내가 느끼기에 한의사 봉직의는 직장인과 프리랜서 사이 그 어디쯤에 위치하여 고용의 안정성이나 복지는 부족하지만 지역이동이 자유롭고 쉬다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한의사 직업의 꽃은 개원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업수완이 좋다면 여러모로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