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ini Sep 22. 2024

히키코모리 생활 청산기

다정해지는 법

약 8년 동안의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와서 성인이 된 이후 내 모습을 돌이켜봤다. 나는 독립적인 성격에 외부적인 환경까지 더해져 소위 히키코모리와 같았는데 생선, 해산물을 제외한 동물성 식품을 안 먹기 때문에 단체식사를 말없이 피하다 보니 사회적 단절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제적 활동을 하고 겉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기에 히키코모리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주변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20대 대부분을 공부에 집중했으니 나름 긍정적인 히키코모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내 모습을 인지한 후에도 외부와의 소통은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따뜻함을 잊고 산지 오래였고 머릿속은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나를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과 연민으로 가득했다. 나에게 타인과의 만남은 나의 부정적인 기운이 전해지지 않도록 온통 신경을 써야 하는 굉장히 피곤한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혼자 지내던 자취방과 달리 본가엔 엄마, 아빠, 언니가 있었고 대학생이던 동생도 방학 땐 내려와 집이 가득 찼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다 같이 여행을 가거나 무언가 배우는 것을 좋아했는데 역시나 내가 내려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족 스터디를 주최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과제를 하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것 같다. 공부로 히키코모리가 되고 공부로 사회화가 되는 걸 보면 나는 배우며 사는 게 평생의 운명인가 싶다.


언니는 살면서 내가 만난 사람 중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자 나의 유일무이한 단짝인데 내가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제일 많이 도와줬다. 내가 방구석에 틀어 박혀 있으면 언니는 내가 가고 싶어 할 만한 카페나 볼거리를 어떻게 해서든 찾아 같이 가보자며 꼬셨고 몸소 운전을 하여 나를 데리고 다녔다.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주기적으로 외출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족과 제대로 소통할 시간이 없었던 나에게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은 사뭇 크게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결혼을 선포했다. 지금처럼 가족들과 지내다가 언니랑 평생 살아야지 하며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이 관계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엄마와 아빠는 어느새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언니는 언니만의 소중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동생은 아직 어려도 나와달리 사회성이 높아 누구보다 인간관계를 잘해나가는 아이다. 차라리 내가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면 편했을 테지만 가족들로 인해 관계 속 따뜻함을 되찾은 상태에서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바뀌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없던 용기를 쥐어 짜내 잊고 있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고 독서모임 등 다양한 기회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 만나보았다. 사람들 속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내 모습이 발현되어 스스로가 불편하고 미워질 때면 다시 방구석에 박혀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뇌과학, 심리학, 인문학 등 온갖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보고 치유했다.


물론 모두와 좋은 인연이 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은 나에게 다정함을 베풀며 다정함을 받았을 때야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을 알려줬다. 사람에게 터득한 깨달음은 텍스트로 배운 지식보다 휘발성이 없는지 내 속에 간직되어 다시금 체화되었다.


이후 나는 서울에 다시 올라오게 되었고 최근 몇 년 동안 쑥스럽게도 다정하다는 말을 꽤나 듣게 되었다. 나도 모두에게 다정하진 못하지만 그러다 다정하지 못할지라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면 자꾸 다정해지고 싶다. 아무런 기대 없이 다정함을 받았을 때 느끼는 온기를 알려주며 말해주고 싶다.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감정이 있다고. 당신도 다정함을 몰랐을 뿐이지 충분히 다정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생 내면을 밖으로 꺼내보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드러내다 보면 굉장히 미숙하고 바라지 않는 모습들이 튀어나와 종종 수치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누구나 이 과정에서 숨어버리고 싶은 순간들많겠지만 그럼에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나다워진 나를 만나고 이를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록하는 과거와 생각들이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되더라도 나는 계속 나를 써나갈 예정이니 세상에 나 같은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자신을 마구 드러내고 표현했으면 좋겠다.

이전 03화 여자 한의사 페이닥터의 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